국토교통 분야 규제 설계 권한이 국회로 돌아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핵심 내용이 법률이 아닌 시행령과 장관 고시에서 창설된 구조를 국회가 조명했기 때문이다. 국회사무처 법제실이 8일 공개한 연구보고서 ‘행정입법 분석·평가 사례’는 주택, 철도, 항공 등 국토 분야에서 법률유보 원칙 위반과 포괄적 재위임이 반복돼 왔다는 점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국회사무처 법제실은 △주택법 △자동차관리법 △건설산업기본법 △항공안전법을 대표 사례로 제시했다. 공통점은 선명하다. 국민의 권리·의무를 결정하는 본질 규제가 법률이 아니라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담겼다는 점이다. 법제실은 “규제는 법률이 정하고, 시행령은 목적 실현 수단이어야 한다”며 재위임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규제 설계권 과반 ‘행정부’에 있었다
법제실은 국토 규제를 네 축으로 나눠 사례를 분석했다. 대표적인 문제가 공공임대주택 매각 가격 산정 방식이다. 매각 가격은 국민이 부담하는 금액이지만, 근거 규정은 법률이 아닌 대통령령에 있었다. 법률은 “매각할 수 있다”는 원칙만 두고, 가격 산정 기준·비율·조건은 전부 시행령에 일임했다.
법제실은 이를 “법률상 근거가 없는 창설적 규정”이라고 적시했다. 이 구조는 2020~2023년 공공주택 매각 과정에서 가격 분쟁을 불렀다. 매수자는 법률에 없는 조건에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없었고, 국토부는 “대통령령에 있다”고 답했다. 법률보다 시행령이 ‘현실 규제’가 되는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여객자동차 운송시장 안정기여금도 같은 구조다. 부담금은 사실상 시장 진입 비용에 해당하는데, 부과 이유·산정 방식·사용 목적 등 핵심 내용이 모두 시행령에 있었다. 법률은 개괄 조항만 두고, 금액 결정권을 행정부에 위임했다. 법제실은 “국민에게 직접 재정 부담을 주는 규정은 반드시 법률에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철도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고속철도차량 운전면허 응시 요건은 시행규칙에서 강화됐다. 법률은 응시 기회를 보장했지만, 시행규칙이 별도 제한을 만들었다. 보고서는 “법률이 예외를 두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규칙이 예외를 만들면 사실상 하위법령이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항공안전법도 벌점·영업정지·교육시간 등 핵심 요소를 부령·고시로 운영했다. 보고서는 이를 ‘포괄적 재위임’으로 규정했다.
▲‘행정입법 중심 운용’의 후폭풍
보고서는 특정 정부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구조는 윤석열 정부 시기 행정입법 운영 방식과 겹친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완화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규제 설계 권한을 국회에서 행정부로 이동시키는 방식이 채택됐다. 정치적 부담은 국회에서 분리하고, 정책 설계는 국토부 내부로 집중한 구조다.
김윤덕 국토부 장관 체제 역시 이 구조 위에 서 있다. 장관은 “현장 중심”을 강조했지만, 현장을 규정하는 실제 문장은 장관 고시와 시행규칙에 있었다. 주택 매각 가격, 부담금 산정, 철도 면허 요건, 항공 벌점 체계 모두 ‘시행령 → 고시 → 절차’가 정책의 핵심이었다.
보고서는 “행정편의를 이유로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법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국토부가 법률은 선언적으로 운용하고, 시행령에 실질 규제를 설계해온 구조를 정조준한 것이다.
법제실은 이번 변화가 가져올 결과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국토부 재량이 줄어든다. 부담금과 가격 산정 방식이 법률로 올라가면 장관 고시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없다. 둘째, 규제 투명성이 상승한다. 금액과 조건이 법률에 담기면 국민은 조항만으로 부담 규모와 기준을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정책 책임성이 강화된다. 정부는 시행령 뒤에 숨기 어렵고, 국회는 정책 실패를 직접 추궁할 수 있다. 넷째, 정책 속도는 느려지지만 권리 보호는 강화된다. 신속한 규제 변경보다 법적 안정성을 앞세우는 구조다. 국회가 던진 메시지는 “규제는 법률이 정하고, 시행령은 논리를 뒷받침한다"로 읽힌다. 국토 행정이 시행령 중심에서 법률 중심으로 이동하는 첫 신호다.
▲모든 것은 국회에서 다시 출발한다
국토 분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정책 무대다. 주택 가격, 철도 면허, 항공 안전은 국민 생활에 직결된다. 이런 영역에서 시행령이 법률을 대신한 구조는 오래 이어졌다. 그 구조는 전 정부에서 강화됐고, 김윤덕 국토부에서 유지 중이다. 이번 보고서는 그 관행을 “헌법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2025년 이후 국토 행정은 법률 중심 구조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재위임 조항을 정비하고, 부담금·가격·면허 같은 본질 규제를 법률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행정부 권한이 축소되는 대신, 국회의 책임도 커진다. 행정입법의 시대에서 ‘의회의 시대’로 전환되는 셈이다.
장지원 국회사무처 법제실장은 “행정입법이 법률 취지를 정확히 반영하고 적법성을 확보하는 것은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의 책무다. 국토교통 분야는 국민 생활과 산업·경제 전반에 직결되는 만큼, 관련 행정입법이 합리적으로 설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과거 시행령이 정책을 만들었다면, 이제 법률이 제자리를 찾는다. 모든 것은 여기, 국회에서 다시 출발한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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