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깊은 곳에서 버티는 힘으로 성장한다. 산업의 가장 아래층을 지탱하는 뿌리가 약해지면 위로 쌓아 올린 첨단산업도 흔들린다. 황덕영 ㈔첨단뿌리산업협회장(에스메탈 대표)은 대전 제조업 기반의 약화가 장기적으로 지역 전략산업의 성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짚어온 인물이다. 연구와 산업, 기업과 기술이 따로 움직여온 대전에서 그는 흩어진 조각을 결속해 산업 생태계를 새로 짜려 한다. 제조업의 체력을 회복해야만 반도체·우주·바이오 산업의 미래도 현실적 기반을 갖출 수 있다는 메시지가 그의 말마다 강렬하게 흐른다.
◆제조업을 묶는 새로운 축
협회는 지역 제조업 기반이 빠르게 약화되는 상황에서 산업 생태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출범했다. 반도체·우주·바이오 중심의 전략산업 강화 속에서 제조업이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우려도 배경이 됐다.
“제조업의 기반이 무너지면 첨단산업도 설 수 없습니다. 산업의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협회 출범의 출발점이었죠. 지역 기업들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협회는 연구기관·대학·기업 사이의 단절된 구조를 연결해 실질적인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조업 수요와 기술 공급이 따로 움직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간 플랫폼 역할도 강조하며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인력·인프라가 제때 맞물리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대전 기업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기업 간 연결을 만들고 기술과 정보가 오가는 구조를 세우는 것이 첫 과제입니다. 이런 네트워크가 구축돼야 지역 산업이 하나의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시의 체력을 세우는 일
대전의 뿌리기업은 200~300곳 수준으로 대부분 소규모이며 영세성이 심화되고 있다. 대표자 고령화, 낮은 투자 여력, 인력 부족 등이 복합되며 경쟁력 저하가 가속된다는 분석도 있다. 업종 전환이나 신기술 도입도 더딘 편이라 구조적 대응이 요구된다.
“대전은 제조업 강점이 약합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예산이 1조 원 가까이 투입돼도 지역 기업의 직접 수혜는 10% 남짓이에요. 이 격차는 제조업 기반이 성장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제조업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첨단산업 역시 독자적인 공급망을 갖추기 어렵고 장기적 성장에도 제약이 생긴다. 수요기업과 뿌리기업 간 역량 파악이 이뤄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누적된 탓이다.
“연구소·수요기업·뿌리기업이 따로 움직이면 대전 산업 전체가 힘을 잃게 돼요. 제조업 기반을 새롭게 짜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세 축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돼야 산업 경쟁력이 실제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대전 산업 생태계를 시작점으로”
협회는 70~80명 규모로 출범해 5개 기술분과와 2개 지원분과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연구자·교수·노무·법무 전문가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해 기술·정보 흐름을 조직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대전 뿌리기업 중에는 홈페이지조차 없는 곳도 많습니다. 협회가 중간 플랫폼이 돼 기업을 묶고 가상 융합 기업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목표예요. 단일 기업으론 불가능한 대응 속도와 규모를 공동체 형태로 만들어가려는 겁니다.”
협회는 기업 간 기술 협력과 장비·인력 지원 체계를 구축해 산업 공동체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하고 있다. 영세기업의 구조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공동 활용’ 운영 모델도 추진해 어려운 설비 투자와 기술 대응을 함께 해결할 구조를 구상하고 있다.
“한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인력·장비·기술을 함께 나누면 경쟁력은 충분히 높아질 수 있어요. 이것이 협회가 지향하는 기본 구조입니다.”
◆뿌리산업의 미래 전략
황 회장은 금형 제조 중심의 전통 뿌리산업이 전국적으로 쇠퇴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대전의 새로운 돌파구는 3D프린팅이라 강조한다. 지역 전문기업과 기술 인프라가 이미 갖춰져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제시했다.
“대전은 3D프린팅 역량이 탄탄합니다. 대전테크노파크 장비도 우수해 관련 기업을 키울 기반이 충분하죠. 뿌리산업의 미래 전략은 이쪽에 있습니다.”
3D프린팅 기반 제조는 소재·설계·가공·부품 개발까지 확장성이 높아 지역 제조업 혁신의 핵심축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협회는 대전형 뿌리기업 인증제 도입을 추진하며 기업 기반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계획이다.
“기업이 인증을 받으면 금융지원·정책지원이 함께 연결돼 성장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런 제도적 기반을 갖추는 것이 왜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죠.”
◆미래도시 기반 세우는 손질
그가 임기 동안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엔지니어센터 구축이다. 장비·기술·숙련 인력을 집약해 제조업 공용 플랫폼을 만들고 영세기업의 한계를 보완하는 구조다.
“공장 가동률이 60%라면 직원들은 사실상 한 달의 절반만 일하는 구조입니다. 장비·인력·기술을 함께 쓰는 플랫폼이 없으면 지역 제조업은 앞으로 더 버티기 어려워요.”
센터 구축은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기반 스마트 제조의 기초가 된다. 젊은 인재 유입과 숙련 기술 교육을 위한 뿌리 아카데미도 함께 구상하고 있다.
“제조업도 AI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청년이 들어옵니다. 기술 교육과 현장 경험을 연결하는 인력 육성 체계는 반드시 필요해요.”
뿌리산업을 다시 연결하고 제조의 체력을 회복하는 일이 대전의 미래 전략산업 기반을 견고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황 회장의 신념은 분명하다. 산업의 가장 아래층에서 생태계를 짜는 노력이야말로 대전이 다음 10년을 버티고 100년을 준비하는 조건이라는 메시지가 인터뷰 전반에 묵직하게 배어 있었던 까닭이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조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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