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남산의 초겨울 공기는 도시에 남은 마지막 잔광을 품은 채 한옥 지붕 위에 얇게 내려앉는다. 서울남산국악당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닥까지 자연광이 스며드는 침상원이 관객을 천천히 공연의 세계로 이끈다. 이 고요한 공간에 곧 한국 수어와 몸의 움직임, 그리고 탈춤의 흐름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무대가 펼쳐진다. ‘춤이 되고 말이 되고’라는 제목처럼, 작품은 언어를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 다른 결로 돌려놓는다.
천하제일탈공작소와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서로의 영역을 오가며 협업을 이어왔다. 탈춤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예술가들은 농문화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쌓으며 움직임의 의미를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거쳤다. 농문화와 농정체성을 바탕으로 활동해온 팀은 탈춤의 몸짓이 지닌 미학적 구조를 새롭게 읽어냈다. 두 단체가 공유한 시간은 작품의 흐름 곳곳에 각자의 방식으로 새겨져 있다.
‘춤이 되고 말이 되고’는 수어·한국어·움직임을 별개의 요소로 두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구조로 엮어낸다. 손끝의 방향과 호흡, 시선의 높이 같은 요소가 음악과 함께 어울리며 시각적 리듬을 만든다. 청각 중심의 무대에서 벗어나 시청각적 균형이 조성되면서 관객은 익숙한 감각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어는 공연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동하며 움직임 전체에 새로운 결을 더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흐름은 이론적 설명보다 직접적인 존재감에 가깝다. 손의 움직임이 몸의 선과 연결되고, 그 흐름이 다시 음악의 박자와 호흡을 형성한다. 의미는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되기보다, 서로 다른 감각의 층위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관객은 말과 춤을 구분하기보다, 움직임 전체가 하나의 언어로 확장되는 과정을 눈으로 따라가게 된다.
작품은 배리어프리 공연의 범주 안에서만 이해하기 어렵다. 접근성을 위한 요소를 추가했다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의 표현이 공연의 구조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다. 농인과 청인이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감각의 차이를 초월하는 경험이 만들어진다. 공연예술에서 표현의 확장을 고민해온 이들에게 실질적인 사례로 남을 만한 구성이다.
초연 이후 여러 과정을 거치며 이번 무대에 오르기까지 두 단체는 지속적인 탐구를 이어왔다. 협업은 단순한 기술적 조율이 아니라 서로의 몸짓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었고, 그 시간 속에서 공연의 형식은 한층 더 균형을 갖추게 됐다. 공동창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의 축적이 어떻게 작품을 변모시키는지 보여주는 흐름이다.
공연 후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는 무대와 일상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서 쓰인 언어적 구성과 움직임의 배경, 공동작업 과정 등이 관객과 공유되면서 공연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예술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순간이다. 이는 작품을 둘러싼 소통의 방식이 무대 바깥에서도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산국악당이라는 공간은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옥의 선과 지하 공연장의 울림, 자연 채광이 스며드는 선큰가든의 구조는 전통적 미감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되는 환경을 만든다. 관객은 무대로 향하는 여정에서 이미 공연의 일부를 경험하게 된다. 공간의 미학적 특성이 작품의 감각적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최근 몇 년간 서울남산국악당은 뚜렷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동시대 예술가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이다. ‘춤이 되고 말이 되고’는 이러한 노선의 지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과 동시대성, 장애예술과 탈춤, 언어와 움직임이라는 다양한 축이 한 무대에서 조화롭게 결합된다.
공연예술은 시대의 감각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하는 장르다. 이 작품은 언어의 구조와 표현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현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농인과 청인이 함께 만들어온 이 무대는 소통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술이 그 가능성을 어떻게 넓혀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2월의 남산에서 관객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열린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손의 움직임이 말이 되고, 말의 흐름이 다시 춤으로 이어지는 무대를 따라가다 보면, 언어라는 것이 소리만의 영역으로 머물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공연장에 퍼지는 조명과 움직임 속에서 소통의 넓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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