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12·3 비상계엄 1년이 된 지난 3일 국민의힘 안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가 부딪쳤다. 송언석 원내대표와 ‘절연파’ 의원들은 “계엄을 막지 못했다”며 국민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장동혁 대표는 “의회 폭거에 맞선 계엄이었다”며 끝내 사과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일본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계엄의 정당성을 재차 주장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장동혁 대표를 향해 “내란공범의 길을 선택했다”며 2차 특검 및 국조까지 거론하면서 내란 프레임을 장기전을 끌고 가겠다는 태세다. 내년 6·3 지방선거는 계엄 책임의 정치적 청산을 둘러싼 양당 간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사과’ 빠진 1057자, 계엄 재정당화한 당대표
정치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움직이는 문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언어를 선택해 말하는지, 어디까지 책임을 인정하고 물어야 하는지가 곧 정치문법이자 전략이다. 12·3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여야가 표출한 ‘사과와 정당성’, ‘내란과 심판’이라는 단어들 뒤에 서로 다른 계산법이 교차한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3일 100여명의 의원을 대표해 “계엄 발생을 막지 못했다”며 국민 앞에 공식 사과했다. 비상계엄이 국민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줬고, 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을 저지하지 못한 데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며 책임을 인정하는 표현까지 담았다.
같은 날 초·재선 중심 25명, 이른바 ‘절연파’ 의원들은 계엄을 ‘반헌법적·반민주적 행동’으로 규정하며, 별도의 반성문을 내고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재창당 수준의 혁신을 선언했다. 이들은 계엄을 단순히 ‘상황 관리 실패’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훼손한 잘못된 조치’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송언석 원내대표의 사과보다 한 발 더 나간 셈이다.
그러나 정작 당대표의 언어는 달랐다. 장동혁 대표는 취임 100일을 맞아 올린 1057자 페이스북 입장문에서 12·3 비상계엄을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라고 규정했다.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국민의힘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당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사과’와 ‘사죄’라는 단어는 철저히 비켜갔다. 책임의 무게를 ‘헌정질서 침해’가 아니라 ‘야당의 폭주와 여당의 분열’로 이동시키는 어법이다.
이날 공개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면 인터뷰는 장 대표의 언어와 거의 포개진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을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 붕괴와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내린 국가 비상선언”이라고 주장하며, 주권자인 국민에게 위기를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계엄의 정당성을 재차 주장한 셈이다. 사과 대신 ‘위기관리와 국민호소’라는 프레임을 선택한 것이다.
정치문법 관점에서 보면, 12·3 비상계엄 1주년 국민의힘 안에는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놓였다. 하나는 주어가 스스로 “막지 못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피해자인 국민을 향해 사과하는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의회 폭거에 맞선 정당한 계엄”으로 위치시켜 책임의 방향을 야당과 의회로 돌리는 정당성 강조의 문장이다. 같은 당이 같은 날,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정치문법은 완전히 갈라져 있다.
‘윤네버(Never)’ 절연파 vs ‘계몽령’ 리더십
이 균열은 곧바로 당내 노선 충돌로 번졌다. 김재섭 의원은 장동혁 대표의 입장문을 두고 “또 다른 계몽령”이라고 직격했다. 그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장동혁 체제로 지방선거를 이겨야 하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을 자꾸 소환하면 이길 수 없다”며 “윤어게인(Again)이 아니라 ‘윤네버(Never)’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계엄에 대한 명확한 사과, 윤 전 대통령과의 단절, 재창당 수준의 혁신이 들어가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이는 친윤계 일부까지 포함한 보수 진영 재편을 노리는 언어이다.
김 의원이 이끄는 초·재선 그룹 25명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사과 메시지를 낸 의원들까지 합하면 30여 명이 계엄 책임과 윤 전 대통령 절연에 공감했다. 김 의원은 “당을 폐허로 만든 윤석열과 절연하지 못하면 대표 자격도, 국민의힘의 미래도 없다”고까지 했다. 여기에 과거 친윤 핵심으로 불렸던 권영세 의원까지 “계엄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잘못된 선택이었다”며 사과했고, 한동훈 전 대표도 국민 앞에 고개 숙였다. 사과와 절연, 혁신을 패키지로 묶어 ‘보수 재건’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셈이다.
반대로 장 대표는 자신을 “보수 정치의 4번 타자”로 자임한다. 그는 비상계엄 1주년 메시지에서 계엄을 옹호하면서도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을 섞어, 책임의 방향을 ‘윤석열 개인’에서 ‘보수 진영 전체의 분열’로 돌린다. 핵심 지지층의 정당성이 무너지는 것을 피하면서, 당의 재결집을 호소하는 언어다. 계엄을 전면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핵심 지지층의 정당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 대표의 언어는 계엄의 불법성 보다는 ‘의회 폭거’, ‘내란몰이’ 같은 단어에 힘을 실으며, 지지층 단속과 집결에 몰입하고 있다.
김재섭 의원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윤 전 대통령이 국민의힘이라는 운동장과 보수 진영이라는 구단을 무너뜨렸는데, 4번 타자가 아무리 잘 쳐도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지금 필요한 것은 ‘새 4번 타자’가 아니라 ‘운동장과 구단의 재건’이라고 꼬집었다. 장동혁 체제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 전제 조건으로 ‘윤네버’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문법으로 보면, 국민의힘 안에는 두 개의 다른 문법이 공존한다. “윤을 끊어야 산다”는 절연파의 문법과, “윤과 계엄을 지키되 분열만 인정하자”는 장 대표의 문법이다. 둘 다 ‘지방선거 승리’를 말하지만, 어떤 유권자에게 기대느냐, 어디까지 책임을 인정하느냐에서 정반대 길은 택하고 있다.
민주당의 ‘내란공범’ 프레임, 롱런 전략
야당의 계산은 또 다른 문법을 따른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장 대표를 향해 “윤석열의 내란 논리를 복창하며 내란 공범의 길을 선택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윤 전 대통령을 두고는 “민주주의에 총을 겨눈 사람의 말로(末路)는 감옥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라며, ‘내란수괴’로 규정했다. 내란 책임에는 “타협도, 용서도 없다”고 못 박고, 윤 전 대통령과 추종 세력 모두 법과 역사 앞에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은 장 대표의 ‘계엄 옹호’ 발언과 추경호 의원 영장 기각을 계기로, 내란 공세의 수위를 오히려 높이고 있다. 비상계엄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이 이어지면서 지지층에서는 “내란 청산이 지연된다”는 불만이 커졌고, 지도부는 ‘2차 내란 특검’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현재의 특검이 끝나도 그냥 덮고 갈 수 없다”고 말한 이후, 내년 초 추가 특검법 논의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여기에 ‘정치검찰 조작기소’ 국정조사와 특검 추진론까지 겹치면서, 민주당은 6·3 지방선거까지 ‘내란세력·정치검찰 프레임’을 유지하는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내란 특검이 끝나도 ‘조작기소 특검’ 등 새로운 전선을 추가해, 보수 진영을 “내란 세력·정치검찰” 이미지에 고정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우려는 존재한다. 비상계엄 관련자들에 대한 영장 기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지지층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강공 드라이브’가 중도층에는 ‘기승전 내란’이라는 피로감과 ‘끝없는 수사정치’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개혁·수사·기소 분리라는 오래된 명분과, 특정 사건에 대한 무제한 특검·국조 요구 사이의 간극도 적지 않다. ‘정의로운 청산’과 ‘과잉 처벌 정치’ 중 어디에 서느냐가 민주당의 집권 후 정치문법을 가르는 요소가 되고 있다.
지방선거, 책임과 청산을 둘러싼 첫 시험대
장동혁 대표는 4일 전국위원회에서 내년 6·3 지방선거를 “이재명 정권의 폭주를 막을 첫 관문”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그는 선출직 공직자 평가 위원회를 통해 정량 지표·여론조사·PT 등을 공천에 반영하는 당헌 개정안을 ‘역사적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추경호 의원 구속영장 기각을 두고는 “내란 몰이를 끝낼 대반전의 계기”라며 “이제 우리 손으로 정권의 탄압을 끝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계엄 문제를 사과의 대상이 아니라 ‘반격의 출발점’으로 둔 문법이다.
그러나 김재섭 의원의 표현대로 지방선거는 결국 “윤어게인이냐, 윤네버냐”를 둘러싼 표심의 심판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계엄을 둘러싼 책임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윤 전 대통령의 언어를 반복하는 지도부 아래에서, 국민의힘이 중도·청년층을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민주당 역시 지방선거를 단순한 지방 권력 경쟁이 아니라, 내란·특검·사법개혁을 둘러싼 국가 시스템 전쟁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내란 수사와 청산, 조작기소 의혹 규명, 검찰개혁 의제가 모두 지방선거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경우, 지역 민생·주거·복지 의제는 또다시 ‘헌정질서 전쟁’의 2차전으로 흡수될 위험이 있다. 그만큼 선거는 더 거칠어지고, 실제 유권자가 원하는 생활 의제는 뒤로 밀릴 수 있다.
12·3 비상계엄 1년, 여야의 언어는 모두 도덕적·헌정적 상징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쪽은 ‘사과, 내란수괴·공범 청산’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의회폭거, 내란몰이, 반격, 정권심판’을 말한다.
내년 지방선거는 여야의 문법에 대한 유권자의 집단적 답변이 될 것이다. 사과의 문법, 정당화의 문법, 청산의 문법 중 어느 것이 한국 민주주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언어인지, 이제는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이 판정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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