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에스툼의 벌판을 빠져나오자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신들의 도시에서 인간의 도시로 넘어가는 기분이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벨리아(Velia), 고대 이름으로는 엘레아(Elea)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기원전 500년대, 지금의 튀르키예 포카이아 사람들이 고향이 함락된 뒤 바다를 건너와 세운 도시라고 한다. 망명민의 도시라는 사실 때문인지 Velia에 들어서면서 묘하게 ‘단단한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도시는 작지만, 그 작은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극장, 광장, 목욕탕, 아고라, 방어벽, 그리고 언덕을 따라 촘촘하게 붙어 있었을 집들까지.
파에스툼이 신전 몇 개만으로도 압도하는 미니멀리즘의 세계였다면, Velia는 마치 생활 밀착형 고대 도시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이 진짜 살려고 만든 도시인 것이다.
확실히 이곳에서는 ‘사람 냄새’와 ‘생각 냄새’가 동시에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바로 엘리아 학파(Elea school) — 세계 철학사에 등장하는 기묘한 사상가 집단 — 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엘리아 학파를 얘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제논(Zeno)이다. 제논의 역설은 사실··· 고대판 말장난의 정점이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절대 따라잡지 못한다며 사람들의 정신을 흔들어놓은 바로 그 철학자.
여기 와서 유적을 걸어보니, 제논이 그 역설을 왜 만들었는지 조금 이해가 됐다. 도시는 유독 조용했다. 돌길이 이어지다 끊기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비스듬히 꺾이는 지형을 걷다가 전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제논은 여기 살면서··· 심심했던 걸까?”
심심한 사람은 결국 세계를 의심한다. 세계가 과연 움직이는지, 내가 움직이는지, 아니면 둘 다 잠깐 쉬고 있는지. Velia의 거리들은 사람을 철학적으로 만드는 부분이 있다.
눈으로 보면 10미터인데 막상 걸어보면 4미터고, 다시 보면 12미터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제논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못 따라잡는다”고 주장한 게 단순한 말장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세계의 허점’을 찾아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타입이었을지도. 현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당신의 상식을 3초 만에 박살 내드립니다’ 같은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을 거다.
Velia가 흥미로운 이유는 철학자들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묘하게 스토리텔링을 자극하는 여인 영웅(여왕) 전승이 남아 있다. 그 이름은 엘리아라고 해두자.
일부 신화 연구자들은 그녀가 단순히 도시를 살핀 인물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긴장을 조정하며 도시의 기틀을 세운 ‘실존적 여왕’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본다. 정치 지도자이면서, 중재자이면서, 때로는 신화와 현실을 잇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상상도 아니다.
사람이 낯선 땅에 도착할 때마다 누군가 앞장섰을 가능성을 떠올리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바다에서 밀려온 사람들을 모아 “여기서 다시 살자”고 말해줄 사람이 누군가는 필요했을 테니까. 지도자라기보다 조정자, 혹은 안심시키는 사람.
도시의 기틀을 세운 건 철학자들이었지만, 도시의 분위기를 만든 건 어쩌면 그런 종류의 여성적 리더십이었을 것이다. 엘리아 학파의 철학이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세계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라는 통찰이라면 도시를 지킨 영웅 엘리아는 보이지 않는 틈을 이어주고,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도시’로 엮어낸 실용적 철학가인 것이다.
Velia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흩어진 사람들을 붙여 만든 공동체의 실험실’처럼 느껴졌다. 파에스툼이 신들의 도시라면, Velia는 인간이 서로를 설득하며 버텨낸 도시였다.
해 질 무렵, 우리는 구아르디아라는 작은 마을의 민박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우리를 맞은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내 나와 미 선배에게 건넸다. 아무 이유도, 큰 의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여행자를 환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수학 선생님이라고 했다. 논리와 생활이 모두 정리된 사람 특유의 단정함이 있었고, 그 단정함 안에 자그마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부부를 보면서 낮에 상상했던 엘리아 여인을 떠올렸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달래고, 다시 삶을 시작하게 만든 누군가의 후손처럼 그들은 조용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민박집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고 우리는 세탁기를 무려 세 번이나 돌렸다. 문명으로의 화려한 귀환이었고, 영적 씻김 의식 같기도 했다. 후니는 마트에서 사 온 삼겹살을 구웠다. 미 선배는 과일을 정리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잘 먹는 역할을 맡았다.
너무 먹기만 잘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잘 먹는 사람은 어디서나 조직의 활력을 담당한다니, 뭐··· 계속 먹을 수밖에.
불판 위 삼겹살이 지글거리는데, 후니는 어쩌다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삼겹살을 집어 드는 동안, 사실은 삼겹살도 당신을 향해 직진하고 있던 것이오.”
나와 미 선배는 그 순간 매우 진지하게 끄덕였을 것이다. 철학은 생활 속에서 농담이 될 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밤은 조용했다. 상상도, 바람도, 철학도 조용히 가라앉았고, 너무 잘 잤다. 벨리아의 철학적 바람도, 파에스툼의 보름달도, 모든 것이 조용히 내려앉은 밤이었다. 좋은 사람들이 있고, 깨끗한 숙소가 있고, 빨래가 완벽하게 된 날이면 인간은 금방 행복해지는 법이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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