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인공지능(AI)·드론·양자기술 등 차세대 국방기술을 보유한 디펜스테크(Defense Tech) 스타트업에 전례 없는 투자가 몰리고 있다. 세계 안보환경이 급변하고, 기술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방위산업 패러다임이 ‘하드웨어 제조 중심’에서 ‘AI·기술 기반의 스타트업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추세는 국내 디펜스테크 스타트업으로도 번지는 분위기다.
◇ 디펜스테크 투자 급증
2일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AI·방위·항공우주 스타트업들이 올해 들어 이미 약 190억달러(약 27조원) 이상의 투자금을 끌어모았다. 지난해 투자 규모가 약 100억달러(약 14조원) 정도였던 점을 고려하면, 증가 속도는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피치북도 올해를 “방위·우주 스타트업 투자 역사상 가장 빠르게 자금이 몰린 해”로 평가했다.
투자 대상은 AI 기반 지휘통제시스템, 정찰·타격 드론, 고성능 센서, 우주 운송·발사체, 신형 에너지 시스템 등 ‘전장 혁신’과 직결되는 분야가 주를 이룬다. 스타트업들이 기존 방산 구조의 문제점인 느린 개발 속도와 비효율적인 조달, 폐쇄적인 공급망을 첨단기술로 해결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새 먹거리’로 떠올랐다는 분석이다.
이 흐름의 배경에는 미 국방부(전쟁부)의 인식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8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포트 맥네어에 있는 국립전쟁대학에서 가진 연설에서 “기존 대형 방산업체 중심의 느리고 관료적인 획득체계로는 AI·드론 등 급변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어렵다”면서 “국방 획득체계를 전시(wartime) 운용을 전제로 한 체계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 실리콘밸리 생태계도 급변
이 변화는 곧 시장에 반영됐다. 현재 신흥 방산·우주 스타트업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는 미 서부 엘 세군도 지역에 신생 방산업체들이 몰려들며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겉으로는 스타트업처럼 보이지만, 기술 수준은 기존 대형 방산업체에 뒤지지 않는 업체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창고형 사무실에서 FPV(1인칭 시점) 드론을 만들거나, AI로 생산라인을 자동화하고, 캡슐형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VC)들도 최근 방산 스타트업을 '핵심 투자처'로 보고 있다. 리스크가 낮은 사스(SaaS,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핀테크, 헬스케어 분야에 집중하던 자본 흐름이 이제 디펜스테크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 가치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오큘러스 창업자인 팔머 러키가 세운 실리콘밸리 기업 안두릴 인더스트리(Anduril Industries)는 미국과 호주 등에서 군용 무인체계 공급망을 빠르게 구축하며 ‘테크 기반 차세대 방산업체’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지난 6월, 기업가치 305억달러(약 44조원)를 인정받으며 25억달러(약 3조6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또한 전장용 레이더와 드론 위협 탐지 시스템을 개발하는 카오스 인더스트리(Chaos Industries)는 지난달 중순 진행된 신규 투자에서 약 45억달러(약 6조6000억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으며 5억1000만달러(약 74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자율수상정(USV)을 개발하는 사로닉(Saronic)도 지난 2월 기업가치 40억달러(약 5조8000억원)로 평가받고 6억달러(약 8800억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댄 드리스콜 미 육군장관은 지난 10월 미 육군협회(AUSA)가 주최한 회의에서 속도, 혁신, 그리고 스타트업 파트너십에 중점을 둔 ‘실리콘밸리 모델’을 활용해 군 조달 절차를 전면 개편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의 조달 일정을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육군은 수년이나 수십억 달러가 아닌 수개월이나 수천 달러로 조달 규모가 도달할 때까지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 국방부가 스타트업을 주요 공급 원천으로 인정한 상징적인 발언으로 풀이된다.
◇ 한국에도 美 벤처캐피탈 투자 사례 등장
이 같은 흐름은 한국으로도 번지는 분위기다. 국내 디펜스테크 스타트업 본(Bone)은 지난달 18일, 초기 투자 격인 시드(Seed) 투자로 170억원을 유치했다. 국내 디펜스테크 스타트업 중 미국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사례로는 최초다.
본에 따르면 이번 투자는 미 밴처캐피탈인 써드 프라임(Third Prime)이 주도했고,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전략적 투자자로 나섰다. 이외에도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케이넷투자파트너스, 더벤처스, 베이스벤처스도 참여했다. 본은 이번 투자를 계기로 단순한 로봇 제조를 넘어 AI가 물리적 세계로 확장되는 ‘피지컬 AI’ 시대에 지능형 국방산업 생태계의 뼈대를 마련해 새로운 국방 제조 르네상스를 이끌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번 투자금은 비전 실현을 위해 AI, 로보틱스, 제조, 공장 관리 분야의 핵심 인재 확보와 연구개발, 생산 역량 강화에 활용될 예정이다.
정부도 국방 AI 분야 스타트업 육성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은 3일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열린 ‘국방 AI 생태계 발전포럼’에서 “국방 부문에서도 AI 적용이 가속화되면서 세계적으로 AX(인공지능 전환) 스타트업이 국방의 중요 주체로 급부상했다”면서 “국내에서도 신산업 스타트업 참여를 촉진해 AI를 비롯한 첨단분야로 방위산업 영역을 확장하고 방산업체 생태계 경쟁력 제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중기부는 관계 부처와 협업해 스타트업의 국방 분야 진입 기회를 확대하고, 국방 AX 소요와 스타트업 AX 역량을 결합해 민간·국방 양 축에서 활약할 수 있는 AX 혁신 스타트업들을 육성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에 대해 국내 스타트업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다만 미국처럼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정부가 먼저 움직이고 민간이 따라가는 구조가 투자 생태계의 활력을 만든다”며 “한국도 정부의 과감한 R&D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처럼 단순히 돈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한국의 산업 환경에 맞는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를 스타트업 육성의 핵심 영역으로 제시했다. 이 관계자는 “센서를 만드는 기반인 초미세 기계 부품 기술은 접근성과 비용도 크게 낮아졌다”며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강한 분야인 만큼, 이런 영역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최근 잇따른 해킹사고로 주목받는 사이버보안 분야 역시 스타트업을 통해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무엇보다 개발 가치에 따른 ‘차등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센서라도 어떤 것은 500억원이 필요한 반면, 어떤 것은 5억원이면 충분하다”며 “그런데 정부 지원은 일괄적으로 10억원씩 배분되다 보니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개발 가치가 높다면 정부가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의사결정권자들이 업계 의견을 듣고,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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