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석주원 기자 | 크래프톤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3분기 누적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는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5월 고점 대비 34.7% 폭락하며 웃을 수 없는 연말을 보내고 있다.
크래프톤 주가는 지난 5월 38만6000원으로 연고점을 찍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며 1일 기준 25만1500원까지 주저앉았다. 이런 주가 추락은 단순한 시장 조정을 넘어 회사의 전략적 한계와 미래 성장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의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3분기 실적 발표 후 증권사들은 크래프톤의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하는 추세다.
올해 상반기 대부분의 증권사는 크래프톤의 목표주가를 50만원대 전후로 제시했지만 하반기에는 30만원대로 대폭 하향 조정하고 있다. 가장 높은 목표주가를 제시한 DS투자증권은 지난 6월 56만원을 제시했지만 11월에는 40만원으로 낮췄으며 보수적으로 접근한 키움증권도 기존 39만원에서 30만원으로 큰 폭의 조정안을 제시했다.
크래프톤의 주가 하락의 주요 원인은 대표 IP인 ‘배틀그라운드’의 매출이 자연 감소하는 상황에서 후속 IP의 개발이 지지부진 하다는 점이다. PC 배틀그라운드는 스팀에서 일 최대 동시접속자 수 60만 이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70~80만에 달했던 올해 초와 비교하면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판 배틀그라운드 모바일(화평정영)의 매출 순위도 하락 추세다.
같은 장르는 아니지만 슈터 장르의 신작 게임들이 높은 인기를 차지하는 부분은 배틀그라운드에 지속적인 압박이 되고 있다. ‘이스케이프 프롬 타르코프’를 비롯한 PvPvE 생존게임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은 장기적으로 배틀그라운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크래프톤도 PvPvE 장르의 ‘PUBG: 블랙 버짓(Black Budget)’을 개발 중이지만 출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올해 출시한 신작들의 성과도 좋지 않다. 배틀그라운드의 뒤를 이을 대표 IP로 주목받았던 ‘인조이(inZOI)’는 출시 초기 일주일 만에 100만장 판매고를 올리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식 출시가 아닌 앞서 해보기(얼리 액세스) 게임의 한계도 명확했다.
빠르게 콘텐츠가 고갈된 인조이는 출시 초기 8만7000명에 달했던 동시접속자가 한 달 만에 1만명 이하로 감소했고 현재는 2000명 안팎으로 폭락했다. 지난 8월 첫 DLC ‘인조이: 섬으로 떠나요’를 출시했지만 동시접속자 반등 효과는 미미했다. 일시적으로 동시접속자 9000명대까지 회복했지만 다시 빠르게 하락했다. 무료 DLC이므로 매출 견인 효과도 없었다.
많은 논란 속에서도 개발을 강행했던 모바일 익스트랙션 슈터 ‘어비스 오브 던전’는 아예 개발이 취소됐다. 어비스 오브 던전은 넥슨과 저작권 분쟁 중인 아이언메이스의 ‘다크앤다커’와 계약을 맺고 ‘다크앤다커 모바일’로 개발을 진행했지만 올해 2월 라이선스 계약을 해지하고 게임명을 어비스 오브 던전으로 변경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후 지난 6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한국을 제외한 일부 지역에서만 소프트 론칭 형태로 출시했지만 시장 반응은 좋지 않았다. 결국 8월 소프트 론칭한 국가 외에는 어비스 오브 던전을 출시하지 않겠다고 밝힌 크래프톤은 지난달 25일 개발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소프트 론칭한 국가에서도 내년 1월 25일 서비스를 종료할 예정이다.
이처럼 내부 개발 신작들이 고전하는 가운데 공격적으로 진행했던 외부 투자 역시 아직까지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올해까지 2조40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통해 다수의 국내외 기업들을 인수합병(M&A) 했지만 손실 규모만 확대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크래프톤의 지분법손실 규모는 2021년 10억원에서 지난해 479억원으로 확대됐다.
지난 2021년 5억달러에 인수한 언노운월즈(Unknown Worlds)는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기대작 ‘서브노티카2’의 출시가 연기된 상황이다. 당초 기대작 서브노티카2는 올해 말에 출시돼 크래프톤의 새로운 대표 IP로 자리했어야 했지만 핵심 개발자들이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출시가 지연된 상황이다. 이와 함께 해고된 전 임원진과의 법적 다툼도 남아 있다.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위해 막대한 개발비를 지원한 ‘칼리스토 프로토콜’ 역시 2022년 출시 후 평단의 혹평과 함께 흥행에 참패했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의 개발사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스튜디오는 2020년 크래프톤에 인수됐는데 인수 비용과 ‘데드 스페이스’의 정신적인 후속작을 표방한 칼리스토 프로토콜 개발에 투자한 비용은 2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크래프톤은 ‘딩컴투게더’, ‘팰월드 모바일’ 등 외부 IP의 인수 및 협업을 통해 다수의 신작을 개발하고 있지만 배틀그라운드의 뒤를 이은 대표 IP로 내세우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래프톤이 ‘AI 퍼스트(AI First)’ 전략을 선언한 것은 단순한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게임 산업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와 회사의 고유한 구조적 리스크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선회로 해석된다.
게임 제작은 투입 비용과 시간에 비해 신작 성공률이 낮은 구조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크래프톤의 인공지능(AI) 도입은 이러한 구조를 혁신해 개발 기간 단축, 비용 절감, 완성도 개선을 목표로 한 것으로 보인다. AI의 가장 큰 전략적 효용은 막대한 자본 투입을 통한 외부 IP 확보 실패를 기술 투입을 통한 내부 IP 제작 효율화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있다.
AI는 게임 제작에 필요한 시간과 리소스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으며 1인 개발자도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현실화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에이전틱 AI 기반의 자동화를 통해 아트, 테크, 디자인, 시나리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워크플로우를 효율화할 계획이며 이를 통해 수천억원의 투자 없이도 다양한 신규 IP를 시도할 수 있는 잠재적 기회를 확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AI가 만능 해결사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AI가 패턴 인식과 자동화에는 탁월하지만 게임이 요구하는 인간적 뉘앙스와 창의적 발상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개발자의 창의성과 탄탄한 기획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AI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춘 신작을 확보하는 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AI 개발 및 활용을 위한 인프라 확보도 과제다. 크래프톤은 GPU 클러스트 구축에 1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지만 고성능 GPU 클러스터의 운영과 관리에는 높은 비용이 지속적으로 투입돼야 한다. 최근 크래프톤은 SK텔레콤과 언어모델을 공동 개발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AI 퍼스트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인력 감축 시도도 논란이 되고 있다. 크래프톤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자발적 퇴사 선택’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복지나 유연한 인력 운용이 아닌 AI 전환을 명분으로 내세운 조직 슬림화 또는 조용한 구조조정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최근 많은 기업들이 AI 전환을 선언하고 업무에 적극적으로 AI를 도입하고 있어 크래프톤의 AI 퍼스트 전략이 새로운 건 아니다”며 “다만 AI 전략이 성공을 거두려면 구체적 로드맵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 검증과 핵심 개발 역량 강화 등 근본적 체질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인력 감축과 비용 절감 등 경영 효율화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주가가 하락하면서 미흡한 주주환원 정책도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크래프톤은 상장 이후 지금까지 주주 배당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은 회사다.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을 쓰면서 올해 상반기 기준 이익잉여금이 5조2896억원에 달함에도 주주에게 환원하지 않으면서 투자 매력도를 크게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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