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기대를 맞추느라 자신의 유년을 제물로 바친 당신에게
칭찬이라는 이름의 독사과
- - “어쩜 애가 이렇게 점잖을까.”
- - “어린애가 속이 깊네. 엄마 힘든 것도 다 알아주고.”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말을 훈장처럼 듣고 자랐을 것이다. 또래 아이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거나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 때, 당신은 묵묵히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욕구를 삼켰다.
어른들은 그런 당신을 ‘효자(효녀)’ 혹은 ‘순둥이’라고 추켜세웠고, 당신은 그 칭찬이 사랑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냉정하게 돌아보자. 일곱 살짜리 아이가 점잖은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열 살짜리 아이가 부모의 감정을 헤아려 자신의 슬픔을 참는 것이 정말 기특한 일인가.
아니다. 그것은 징후다. 그 아이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가장 서늘한 신호다. 식물에 비유하자면, 충분한 햇볕과 물을 받지 못한 과일이 생존 본능으로 에틸렌 가스를 내뿜어 비정상적으로 빨리 익어버린 상태다.
겉보기에는 붉고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떫고 푸석푸석한 맛이 나는 병든 과일.
당신이 들었던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의 부모가 부모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는 직무 유기의 증거이자,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유년 시절을 통째로 도려냈다는 슬픈 진단서였다.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아이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도구로 본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미성숙하여 자신의 감정조차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만만하고 가까운 대상, 바로 어린 자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의존한다.
당신은 아마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상담사였거나, 아빠의 화를 받아내는 샌드백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어린 당신을 붙잡고 “네 아빠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된지 아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그 순간, 부모와 자식의 역할은 역전된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공포와 슬픔을 담아주는 그릇(Container)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의 집에서는,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가 거대한 부모의 감정을 받아내야 했다. 아이는 부모가 무너질까 봐, 부모가 나를 버릴까 봐 공포에 질린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부른다. 아이가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는 비극. 당신은 보호받아야 할 시기에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당신의 어깨 위에 놓인 그 짐은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집이라는 세계가 붕괴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에, 이 악물고 버텼다. 당신의 ‘거짓 성숙’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가짜 자아(False Self)의 탄생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조건부 사랑을 제공한다. “네가 내 말을 잘 들을 때만”, “네가 나를 빛나게 할 때만”, “네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때만” 사랑을 준다. 반대로 당신이 아이답게 굴 때, 즉 떼를 쓰고, 실수를 하고, 의존하려 할 때 그들은 혐오감을 드러내거나 차갑게 외면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치명적인 공식을 학습한다. ‘나의 진짜 모습(욕구, 감정, 어리광)은 사랑받지 못한다. 아니, 위험하다.’
살아남기 위해 당신은 ‘진짜 자아’를 무의식의 지하실 깊숙한 곳에 가두고,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된 가짜 자아(False Self)’를 연기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모범생, 말 잘 듣는 딸, 불평 없는 아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법을 잊어버렸다. “난 괜찮아”가 입버릇이 되었고,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레이더는 비정상적으로 발달했다.
그렇게 당신은 어른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당신은 유능하고, 배려심 깊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평가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내면은 어떤가. 텅 비어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다. 남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속이 썩어들어가면서도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이것은 성숙함이 아니다. 이것은 ‘연기’다. 평생을 무대 위에서 남이 써준 대본대로 연기해 온 배우가 느끼는 지독한 공허함. 그것이 당신이 밤마다 느끼는 우울의 정체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병
거짓 성숙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타인에게 의존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당신은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파도 혼자 끙끙 앓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신에게 패배나 민폐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초-독립성(Hyper-independence)을 보인다.
이것은 강인함이 아니다. 이것은 트라우마 반응이다. 어린 시절, 가장 의존했어야 할 대상(부모)에게 거절당하거나 착취당했던 경험이 당신의 뇌에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기대하면 상처받는다”는 공포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타인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한다.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면 “나중에 뭘 요구하려고 저러나” 싶어 불안해한다. 당신은 타인을 돌보는 데는 능숙하지만, 타인의 돌봄을 받는 데는 젬병이다. 사랑을 주는 것은 안전하지만(통제 가능하니까), 사랑을 받는 것은 위험하다고(통제 불가능하니까)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철저히 고립된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어른스럽지만, 속으로는 누군가가 제발 내 가면을 벗기고 “많이 힘들었지?”라고 물어봐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늦게 핀 꽃이 되기를 허락하라
이제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성숙한 어른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노화된 어린이’일 뿐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당신 내면의 아이는 아직 일곱 살, 열 살 그 시절에 멈춰 서서 부모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나의 지난 삶이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껍질을 깨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타인의 인생을 사는 조연으로 남게 된다.
지금이라도 당신은 당신의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되찾아야 한다.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퇴행을 허락하는 것이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안전한 관계(친구, 연인, 혹은 상담사) 속에서, 혹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유치해져라. 먹고 싶은 것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보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겠다고 떼를 써라. 별것 아닌 일에 엉엉 울어보고, 이유 없이 짜증도 내어보라. “나 힘들어”, “나 못해”, “도와줘”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연습을 해라.
이것은 퇴보가 아니다. 이것은 건너뛰었던 성장 단계를 다시 밟는 재양육(Re-parenting)의 과정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부모가 되어, 억눌렸던 내면 아이의 욕구를 허용하고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버려라. 부모를 실망시켜라. 그들이 “너 변했다”, “이기적이다”라고 비난한다면, 기뻐해라. 그것은 당신이 드디어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당신 자신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축포 소리다.
당신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느라, 아이가 될 기회를 놓쳤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맘껏 미성숙해져라. 비바람을 맞고, 흔들리고, 꺾이기도 해라. 그 늦은 성장통을 겪고 난 뒤에야, 당신은 비로소 단단한 뿌리를 가진 진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가면을 벗어라. 그 안에서 울고 있는 꼬마를 안아줄 사람은, 이 우주에서 오직 당신뿐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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