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엔 암기에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국사, 세계사 공부가 재미없었다. 중학교 때는 특히 사회 과목 점수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사회 선생님이 내 그림 실력을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사용하시겠다고 앞머리는 다 깎고 뒷머리만 길게 기르는 ‘채두변발’ 그림을 크게 그려달라고 하셨다.
머리 모양이 좀 기이한 사람의 옆 모습을 큰 도화지에 그려다 드렸고 그 그림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분명 시험을 잘 못 본 것 같은데 점수가 잘 나와서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역사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고 결국 이과를 거쳐 공대에 가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건축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시니어들과 서울 시내를 걸으면서 건축 이야기도 하고 역사 이야기도 나눈다.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건축 여행’은 건축물과 건축가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렇게도 싫어하던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건축물과 건축가의 이야기에 역사를 더해서 퍼즐을 맞춰나가는 작업은 매우 흥미롭다. 서울 여기저기에 묻혀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발굴해 나가면서 요즈음은 건축 역사학자가 된 기분이다.
최근에 경희궁에서 딜쿠샤까지의 건축 여행을 준비하면서 답사를 하고 그 주변 건축물 자료를 찾아보았다. 강의 며칠을 앞두고 예정된 여행 코스를 한 번 더 답사하다가 우연히 ‘국립기상박물관’이라는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여러 번 그 길을 지났지만 그냥 무심히 지나던 곳이었다.
호기심에 안내판을 따라 올라갔다. 한참 산을 오르니 산 정상에 아담하고 고색창연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그 분위기가 분명 조선 말기 또는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로 짐작이 되었다.
자칫 그냥 지나칠 뻔했던 국립기상박물관을 알게 되었다. 과거 그곳까지 경희궁 영역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주변에서 높은 지대라고 한양도성 일부를 허물고 1932년에 서울기상관측소를 세웠다고 한다. 이제 93년이 되었다. 지금도 기상박물관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일부 구간이 잘려 나간 도성의 흉측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도 그렇다. 이곳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도성을 잘라먹고 동대문운동장을 만들었다. 그 동대문 축구장과 야구장 자리에 DDP 국제 현상설계 공모를 했다. 국내 건축가들은 대부분 한양도성을 복원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안을 제시했지만 자하 하디드 설계안이 선정되면서 끊어진 도성의 복원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국립기상박물관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측우기 원본이 있다. 역사책에서 접하지 못했던 측우기에 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기상박물관 건축물도 특별하다.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을 볼 때마다 건축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이 많아진다.
100년이 다 되어가는 건축물이 이렇게 디자인도 매력적이고 외벽에 붙여놓은 타일도 멀쩡하니 말이다. 심지어 외벽 모서리 타일은 45도로 갈아내어 마주치는 모서리를 완벽하게 시공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시공하지 않는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의가 없어서다.
국립기상박물관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와 벚나무도 의미가 있다. 여기 있는 벚나무에 꽃이 피면 서울에 봄이 당도한 것으로, 단풍나무에 단풍이 들면 서울에 가을이 시작된 것으로 기준을 잡는다고 한다.
국립기상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담장에 난 작은 문을 통과하니 경희궁으로 연결되는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을 내려오다가 문득 작년에 향년 89세로 소천하신 김동완 통보관 생각이 났다. 지금은 늘씬한 여성 기상 캐스터가 TV에 나와서 날씨를 알려주지만 김동완 통보관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큰 종이에 매직펜으로 고기압 저기압 그림을 그리고 태풍이 지나가는 길도 그림으로 표시했다.
그분의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퇴직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TV에서 여성 기상 캐스터가 알려주는 내일 날씨를 함께 시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날씨 해설이 끝나고 나서 누군가 “그런데 내일 날씨가 어떻대?”하고 물었다는 것인데, 다들 대답을 못 했다는 것이다. 모두 날씨는 제대로 듣지 않고 여성 기상 캐스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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