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화려한 미래'보다 '확실한 현재'가 돈이 되는 시대다.
2025년 IPO(기업공개) 시장은 대형 기업의 부진과 중견기업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조 단위 대어'라는 이름값만 믿고 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은 고평가 논란 속에 줄줄이 상장을 철회한 반면, 내실을 다진 알짜 기업들은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으며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고금리와 시장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이제 투자자들은 장밋빛 청사진 대신 숫자로 증명된 '성적표'를 요구하고 있다.
<뉴스락>뉴스락>은 실적 중심의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된 2025년 IPO 시장의 현주소와 시사점을 짚어봤다.
미래 가치보다 '당장의 성적표'...알짜 중견기업의 약진
2025년 기업공개(IPO) 시장을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단연 '실적'이었다.
미래 성장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며 유동성을 공급하던 과거의 관행은 완전히 사라졌다.
올해 시장은 구체적인 수치로 펀더멘털(기초체력)을 증명한 기업에게만 자금의 문을 열었다.
조 단위 평가를 받던 대형 기업들이 고평가 논란 속에 잇따라 상장을 철회한 반면, 합리적인 밸류에이션과 탄탄한 내실을 앞세운 중견기업들은 까다로운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지난 10월, 제도 개선 이후 첫 코스피 상장사로 등판한 명인제약의 사례는 시장의 변화된 기류를 명확히 보여준다.
명인제약(회장 이행명)은 상장 과정에서 '철저한 시장 친화적 가격'을 최우선 전략으로 채택했다.
통상적인 업계 평균 공모가 할인율인 20~33%를 훌쩍 웃도는 32.4~47.6%의 파격적인 할인율을 제시하며 투자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
이러한 보수적 가격 전략의 이면에는 압도적인 기초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명인제약은 전체 매출의 76.4%를 차지하는 중추신경계(CNS) 전문의약품 분야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수성 중이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CNS 의약품 수요 증가는 명인제약의 안정적인 현금 창출 능력을 담보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시장 지배력과 성장성을 겸비했음에도 욕심을 버리고 시장 눈높이를 맞춘 전략이 적중했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모듈러 건축 전문기업 엔알비가 '실적주'의 면모를 과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엔알비(대표 강건우)는 적자 기업들이 주로 활용하는 기술 특례 상장이 아닌, 실적 기반의 일반 상장 방식을 택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2019년 설립 후 불과 6년 만에 매출 규모를 7배 이상 확대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숫자로 입증한 덕분이다.
실제 엔알비의 매출은 2021년 72억 원에서 2024년 528억 원으로 연평균 94.4%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외형 성장과 더불어 매년 흑자 기조를 유지하며 시장의 수익성 우려를 불식시켰다.
여기에 정부가 추진 중인 탈현장 공법(OSC) 주택 5,000호 공급 정책은 엔알비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엔알비는 정책적 수혜와 명확한 실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모 과정에서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증시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지난 8월 코스피에 입성한 대한조선 역시 조선업 슈퍼사이클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경쟁사 대비 가격 매력을 높이는 신중한 밸류에이션 전략을 통해 5,000억 원 규모의 중형급 IPO를 성공시켰다.
"거품 낀 대어는 필요 없다"...고평가·중복상장 논란에 무릎 꿇은 대기업
탄탄한 중견기업들이 약진하는 사이, 몸집만 불린 대형 기업들은 시장의 냉혹한 검증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2025년 상반기 IPO 시장의 최대 기대주로 꼽혔던 기업들이 줄줄이 상장 계획을 백지화했다.
상반기 대어로 주목받았던 DN솔루션즈와 롯데글로벌로지스는 수요예측 단계에서부터 기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DN솔루션즈는 지난 4월 30일, 롯데글로벌로지스는 5월 2일 금융감독원에 상장 철회 신고서를 제출했다.
양사는 철회 사유로 "제반 여건상 회사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렵다"며 시장 불확실성을 탓했으나, IB(투자은행) 업계는 '무리한 고평가'를 실패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했다.
두 기업은 5조 원 안팎의 높은 기업가치를 희망했으나, 금리 인하 지연과 경기 둔화 우려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눈높이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실적 대비 과도하게 책정된 공모가 희망 밴드는 결국 기관의 자금 집행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상장 추진은 무위로 돌아갔다.
SK엔무브의 상장 무산은 가격 요인보다 복잡한 지배구조 이슈가 결정타가 됐다.
2013년 이후 네 번째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회사 SK이노베이션과의 중복상장 문제가 다시금 불거졌다.
한국거래소는 모회사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상태에서 핵심 자회사가 별도로 상장할 경우 발생할 모회사 주주가치 희석을 우려해 강도 높은 주주 보호 방안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재무적투자자(FI)와의 이해관계 조율도 난항을 겪었다. 거래소 측의 구주 매출 비중 축소 요구와 투자 회수 수익률을 확보해야 하는 FI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SK이노베이션은 상장 추진을 철회하고, 지난 6월 25일 이사회에서 FI가 보유한 SK엔무브 지분 30%를 재매입하기로 의결하며 완전 자회사 편입 수순을 밟았다.
강인혜 삼정KPMG IPO지원센터장은 “최근 IPO 시장은 기업가치 중심의 투자환경이 강화되면서 기업의 사전 준비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파두 사태'가 남긴 교훈... 2026년, 검증된 '진짜 대어'들의 귀환 예고
엄격해진 상장 심사 잣대는 2025년 IPO 시장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한국거래소는 지난해 불거진 '파두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상장 심사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파두는 2024년 8월 코스닥 상장 당시 연간 매출 추정치를 1,202억 원으로 제시했으나, 실제 3분기 매출이 3억 원대에 그치며 '뻥튀기 상장'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에 거래소는 상장 예비 심사 단계부터 기업의 실적 지속성과 내부통제 시스템을 현미경 검증하기 시작했다.
제도적 장벽은 수치상으로도 명확히 높아졌다.
금융당국이 발표한 'IPO 및 상장폐지 제도 개선방안'에 따르면, 2026년부터 코스피 상장을 위한 시가총액 기준은 현행 50억 원에서 200억 원으로, 코스닥은 40억 원에서 150억 원으로 4배 가까이 상향 조정된다.
아울러 모자(母子) 회사 중복상장에 대한 심사 가이드라인도 구체화되어, 모회사 일반 주주를 위한 실질적인 보호 방안 제시가 의무화됐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된 기관투자자 공모주 30% 이상 의무 보유 제도는 상장 직후 단기 차익을 노리는 '단타 수요'를 차단하며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김기록 삼일PwC 글로벌 IPO 서비스 리더는 "글로벌 IPO 시장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며 "기업들은 거시 경제 환경에 따른 리스크 관리와 유연한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금융투자업계는 거품이 빠지고 심사 기준이 정비된 2026년을 '검증된 대어들의 귀환' 시기로 보고 있다.
시장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확실한 실적과 성장성을 갖춘 대형 비상장 기업들의 IPO가 재개될 전망이다.
케이뱅크와 무신사 등 시장의 기대를 모으는 기업들이 상장 채비를 서두르고 있으며, 시가총액 1조 원대 평가를 받는 리브스메드도 연내 상장을 완료할 예정이다.
전성인 전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적자 기업이 손쉽게 상장에 진입해 투자자 피해를 양산했던 관행이 사라지고 있다"며 "상장폐지로 몰고 가기보다 심사 단계에서부터 부실 기업을 걸러내는 것이 시장 건전성 확보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최종경 흥국증권 연구원은 "리브스메드 상장을 시작으로 대형 기업들이 등판하고 증시 상승세가 더해진다면 IPO 시장은 2021년 수준의 호황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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