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현대 이탈리아 영화에서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미학을 구축해온 감독으로 평가된다. 로르바케르의 영화는 사회적 현실, 우화적 장치, 감각적 리듬을 서로 접합해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관점, 종종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투명한 시선을 드러내왔다. ‘행복한 라짜로’는 이러한 로르바케르 세계가 한 단계 응축된 영화이며, 그가 지속해온 주제적·형식적 실험이 결실에 이른 지점으로 읽힌다.
로르바케르 영화의 기원은 사실주의 전통에 닿아 있으나, 그 사실주의는 기록적 정확성보다 ‘감각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 무게를 둔다. 감독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의 틈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관계의 흔들림을 관찰한다. 이 때문에 로르바케르의 영화 속 인물들은 흐릿한 선과 경계 속에서 움직이며, 사회적 구조보다는 그 구조가 사람들의 몸과 표정에 남기는 흔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관객을 이끈다.
‘행복한 라짜로’는 이러한 미학적 태도가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영화가 계급 착취, 농촌 공동체, 도시 빈곤 등 사회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선언적 문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로르바케르가 구조보다 인간의 표정과 숨소리로 세계를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로르바케르는 라짜로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모호한 서정 속에서 떠올리고, 인물이 세계와 충돌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이것은 비판적 관찰이라기보다 하나의 윤리적 감식에 가까운 태도다.
로르바케르는 언제나 ‘경계에 위치한 인물’을 다뤘다. 그의 초기작들에서도 개인은 공동체와 제도 사이의 중간 지점에 놓였고, 그 틈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진동이 주요 서사가 됐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이러한 경계는 시간의 차원까지 확장된다.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사건의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세계를 하나의 연속된 감정으로 엮기 위한 장치로 활용한다. 시간은 현실계와 우화계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이며, 라짜로의 존재는 이 경계를 가로지르는 매순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로르바케르의 영화적 윤리는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향해 있다. 그는 인물들을 도덕적 판단으로 나누지 않고, 그들이 놓인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행동의 결을 더 오래 바라본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도는 있지만, 감독의 시선은 어느 한쪽을 악의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 구조를 가능하게 한 감정의 체계, 오래 축적된 무감각,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게 만드는 시대적 감성에 집중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탈리아 신사실주의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오늘의 감각으로 새롭게 번역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특히 로르바케르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이미지의 질감이다. 그는 인물을 기록하듯 촬영하지만, 그 기록은 초현실적 기운을 품고 있다. 자연광의 흔들림, 풍경의 결,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현실과 신화를 가르는 경계선을 흐리며, 세계가 일종의 ‘감각적 우화’로 재편된다. 이 영화적 공간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떠올리게 하지만, 로르바케르의 마술성은 과장된 사건보다 인물의 침묵과 몸짓에서 발현된다. 기적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존재하며, 라짜로는 그 상태의 중심에 서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로르바케르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인간성의 문제를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선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상화하지 않고, 그 선함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오해되고 부서지는지를 예리한 시선으로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냉소나 비관을 선택하지 않고, 선함을 세계와의 긴장 속에 놓아두는 방법을 취한다. 라짜로의 존재는 현실과 조응하지 않지만, 그 불일치가 바로 로르바케르가 관찰하려는 윤리적 질문의 핵심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로르바케르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응시하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로르바케르는 건조한 사회학적 분석 대신, 한 인물이 투명하게 빛나는 순간을 포착해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그리고 이 빛이 세계를 바꾸는 데 실패할지라도, 그 실패의 과정 속에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믿는 듯하다. 이것이 로르바케르의 윤리적 신념이며, 그가 다른 감독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작품의 결말은 감독의 일관된 태도를 완성한다. 라짜로는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세계 또한 그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된 상태를 유지한다. 여기서 로르바케르는 비극을 넘어선 감정, 인간의 본질이 세계의 조건과 무관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희박한 믿음을 제시한다. 이는 현실을 체념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매우 독자적인 형태의 윤리적 아름다움이다.
결국 로르바케르의 영화는 인간의 본성을 응시하기 위해 우화를 필요로 하고, 세계의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 시적 이미지를 선택한다. ‘행복한 라짜로’는 그가 구축해온 미학적·윤리적 세계가 가장 깊은 층위에서 응축된 작품이며, 앞으로의 작업을 가늠하게 하는 이정표와도 같다. 영화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동시에, 오늘의 세계가 잃어버린 감수성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특별한 영화적 경험으로 남는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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