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르망 24시 레이스의 마지막 바퀴. 몹시 더러워지고 부딪쳐 찌그러진 차들이 굉음을 내며 ‘뮬산’이라 불리는 직선 주로에서 결승선을 향해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었다. 선두 하이퍼카들은 장장 24시간 동안 5000km가 넘게 달린 상태였다. 83번 AF 코르세 페라리 499P의 운전대를 잡은 로베르트 쿠비차는 6번 포르쉐와 대략 15초 차이를 두고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바퀴만 페이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면 우승은 그의 차지가 될 예정이었다. 차 안 모습을 잡은 카메라는 헬멧의 열린 바이저를 통해 그의 두 눈을 비췄다. 아주 좁은 부분만 드러나는데도,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쿠비차는 “마지막에는 세 시간 반 동안 차를 몰았어요”라며 “무척 긴 주행이었고, 24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지쳤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터널의 출구를 보듯, 결승선을 무사히 통과하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트랙 주변에서만 약 33만 명이 넘는 팬들이 환호를 하고 있었고 스크린을 통해 보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 명이 넘었다. 경주 종료를 알리는 체커기가 휘날리는 순간, AF 코르세 피트 그리고 이탈리아와 폴란드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83번 AF 코르세 페라리가 2025 르망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TV 해설자가 외쳤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로베르트 쿠비차가 달린 마지막 두 시간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찬사를 경험하는 레이서는 흔치 않다. 르망 시상대에 서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눈 위로 쏟아지는 샴페인 줄기를 느끼는 것. 자신의 나라 최초로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일. 모든 훈련, 수천 시간에 이르는 테스트 주행과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의 결과가 모이고 모여 이루어낸 순간이다. 로베르트 쿠비차는 마치 날아가는 화살처럼 살아왔고, 비로소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힌 셈이다. 대다수 운동선수에게 이런 승리는 인생의 전환점일 것이다. 그러나 쿠비차는 대부분의 운동선수와는 다르다. 그의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다.
며칠 뒤, 쿠비차는 바르샤바로 돌아가 스폰서십 행사에 참석했다. 평소 모터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가 르망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TV에서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포디엄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차원이 아니라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게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애쓰고 있는데, 당신의 우승과 당신의 이야기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동기를 부여하며, 당신은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하는 본보기가 된다’고 말하더군요” 쿠비차의 말이다. 매사 신중하며 모든 일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는 성격인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건 르망의 마법 같은 우승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 활동하고 있는 레이싱 드라이버 가운데 쿠비차보다 더 많은 승리와 비극을 경험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좀처럼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인물이다. “저는 유명세나 지위를 좇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오랜 시간 이어진 줌 화상통화 내내, 그는 무척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때로는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탓에 적합한 단어를 떠올리려 머뭇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마치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고 승리의 영광을 맛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양, 쿠비차에게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긴 이야기는 그가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던, 폴란드가 아직 철의 장막 잔재 뒤에 가려져 있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쿠비차는 2006년 이탈리안 GP에서 슈마허와 키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레이스가 그의 F1 데뷔 이후 고작 3번째 레이스였다는 점이다. ⓒ DAMIEN MEYER/AFP VIA GETTY IMAGES
“취미 삼아 이 작은 차를 가지고 놀던 것이 시작이었어요.” 쿠비차가 회상한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카트를 탔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의 일이다. “그 시절 폴란드에서는 어린아이가 네 바퀴에 가솔린 엔진이 달린 무언가를 운전한다는 것이 무척 생소했어요.” 그의 부모는 작은 인쇄 사업을 하며 CD를 제작했는데, 폴란드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버지는 자동차에 관심이 무척 많은 분이었지만, 차를 살 여력이 없었어요. 사업이 성장하고 돈을 벌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아버지는 제가 다른 아이들보다 운전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죠.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운전을 정말 좋아했던 쪽은 저보다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저에게라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쿠비차는 일곱 살 무렵 카트 경주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나오면 아버지는 차 지붕 위에 카트를 묶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카트 트랙까지 한 시간 반을 달려가야 했다. 쿠비차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그들은 이탈리아를 거쳐 포르투갈까지 가야만 했다. “저희는 정비사 한 명과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어요.” 그의 말이다. “저희 아버지와 저, 단둘만 레이스를 위해 돌아다녔죠.”
그는 그 몇 년간을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시기”라 회상한다. 삶은 단순했다. 한 소년과 그의 아버지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레이스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매번 돈에 쪼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항상 어머니에게 제가 카트를 타지 않았다면 우리가 훨씬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이야기해요.” 쿠비차의 말이다. “저는 50㎡도 안 되는 아파트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이 버시는 돈 대부분이 제가 카트를 타는 데 쓰였죠.”
쿠비차의 아버지는 이따금 쿠비차가 예선에서 1위를 하더라도 결승 경기 때는 일부러 마지막에서 출발해 추월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쿠비차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레이스에서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수많은 순간들을 기억한다. 결국 쿠비차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이탈리아의 카트 제조업체이자 레이싱팀인 ‘CRG’에서 후원을 받게 됐다.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며 연습에 매진했다. 2000년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들어왔어. 포뮬러 르노 경주차로 달릴 수 있게 해준다는 거야.”
르망에서 승리를 차지한 No.83 AF 코르사 페라리에 남아있는 전투의 상흔들이다. 499P는 24시 클래식 내구 레이스에서 3번 연속 우승했다. 차량은 네바퀴굴림이며 V6 트윈터보 미드십 엔진과 앞 차축에 장착된 전기모터를 심장으로 한다. ⓒ 499P PHOTOGRAPHY BY MATTIA BALSAMINI
포뮬러 제안을 들었을 때 쿠비차는 울음을 터뜨렸다. “포뮬러에 진출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카트 레이스를 계속하고 싶었죠. 카트 타는 일은 제가 정말 좋아했고, 잘하고 있었어요. 솔직히, 그 이상은 필요 없었어요.”
“F1 경주차로 첫 테스트를 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쿠비차의 말이다. 2005년의 일이었고, 그가 스물한 살이 된 무렵이었다. 그는 포뮬러 르노와 포뮬러 3 과정을 뛰어난 성적으로 마친 상태였다. ‘2005 월드 시리즈 바이 르노’에서 우승한 뒤, 그는 베네핏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서킷에서 열리는 르노 포뮬러 1 경주차 테스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F1 경주차를 가까이서 본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서 총알처럼 스쳐 지나가는 F1 차량을 보고 저는 제 매니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난 못 해!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너무 빠르다고!’ 그런데 그다음 날, 저는 F1에 올라탔고, 이내 저도 빠르게 차를 몰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럼에도 실제로 F1에 출전한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는 “폴란드 출신 드라이버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겠어?”라고 말했어요. 폴란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그가 F1 출전을 위한 계약을 맺었을 때, 그의 삶은 바뀌었다. 당시 폴란드는 이제 막 TV에 각종 버라이어티 쇼와 프로스포츠가 중계되면서 서방 세계에 편입되는 중이었다. 쿠비차는 갑자기 팬들에게 둘러싸여 슈퍼마켓에도 갈 수 없었다. 극단적 상황이었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 같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한편, 패독에서 쿠비차는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드라이버들과 함께했다. F1에서의 경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척 지치는 일이다. 엘리트 모터스포츠는 소수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런 일은 순수함의 상실이나 감정의 상실 같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드라이버가 기계의 일부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1위에서 2위가 아니라 20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쿠비차는 2006년 BMW 자우버 소속으로 여섯 차례 경주에 출전해 시상대에 한 번 올랐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다. 2007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야르노 트룰리가 모는 토요타 경주차와 부딪친 뒤에 쿠비차는 트랙에서 벗어나 벽에 처박혔다. 당시에는 신생 웹사이트였던 유튜브 덕분에, 전 세계 수백만 명이 그 영상을 봤다. 그 영상을 보면, 누구라도 그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쿠비차는 “2007년 발생한 그 사고는 이전보다 F1의 인기를 훨씬 더 높여줬다”고 이야기한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와 무관한 사람들이 사고 영상을 봤기 때문이죠. F1 역사에서도 아주 큰 사고 가운데 하나였어요. FIA와 모터스포츠가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사고가 HANS 장비가 도입된 첫해인 2005년 이전에 일어났다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놀랍게도 쿠비차는 단 한 경기만 결장하고 3주 뒤에 마니쿠르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복귀했다. “두려움은 없었어요. 대형 사고를 겪은 레이스카 드라이버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사진 속 499P는 2025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2등인 포르쉐보다 14.084초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24시간을 달렸는데 약 14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경기가 치열했다는 뜻이다.
그날의 경기에서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한 건 No.38번을 달고 달렸던 캐딜락의 3분 23초 063이었으며, 최고 속도를 기록한 건 499P의 349km/h였다.
그 사고로부터 1년 뒤, 쿠비차가 캐나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예선 2위에 오르고 우승까지 차지한 일은 F1 역사상 가장 멋진 주행 중 하나였다. 그가 체커기를 지났을 때, 그는 무전을 통해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로베르트, 브라보! 브라비시모! 브라비시모! 역사적인 승리예요, 로베르트!”
쿠비차는 F1에서 첫 승을 거뒀다. 폴란드 사람들의 축하는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는 세계 정상에 올랐다. 짧은 시간이나마 쿠비차는 F1 챔피언십 선두를 달렸고, 최종 4위로 마무리했다.
그는 몬트리올에서 우승 직후, F1에서 은퇴한 노장 드라이버 장 알레시가 “나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말라”고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쿠비차는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쿠비차의 매니저가 설명하기를, 알레시는 단 한 번의 레이스에서만 우승했는데, 그곳이 바로 캐나다였다.
“인생이 미리 써놓은 대본처럼 흘러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쿠비차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믿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들으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했죠. 다행스럽게도, 저는 F1 그랑프리에서 한 번 우승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다행스럽게도’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전혀 우승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우승하는 쪽이 나아서죠. 더 많은 레이스에서 우승하고 싶었지만,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죠.”
2010년 르노로 이적한 쿠비차는 2012년 페라리로 이적하며 세계 챔피언이 될 중요한 기회를 맞았다. 그는 F1 경력 말고도 랠리 드라이빙에도 열정적이었다. 2011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론데 디 안도라’ 경기 도중, 그의 슈코다 파비아 경주차가 철제 방호벽에 충돌했고 그는 오른쪽 몸 전체에 40곳 이상 골절상을 입은 채로 시트에 갇혀 있었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같은 폴란드 출신인 코드라이버 야쿱 게르베르는 〈라 가제타 델로 스포트〉와의 인터뷰에서 그 끔찍한 사고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차가 가드레일을 완전히 관통해버렸어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죠” 게르베르의 말이다. “로베르트는 의식을 잃었고, 사고로 문이 열리지 않아 저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어요.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이어서 소방대원이 왔어요. 그들이 쿠비차를 끌어내는 데는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 번째 대원들은 절단 장비가 없어서 다른 대원들을 기다려야 했고요. 게다가 헬리콥터가 사고 지점에 착륙할 수 없어서 로베르트를 들고 옮겨야 했습니다.”
BMW 자우버팀의 2001년 F1 라인업은 자크 빌뇌브, 닉 하이드펠트 그리고 리저브 드라이버였던 쿠비차였다. ⓒ FRIEDEMANN VOGEL/BONGARTS/GETTY IMAGES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제 몸 상태가 몹시 나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쿠비차는 이렇게 회상한다. “몸에 남은 피가 많지 않았어요. 살아남으려 몇 달, 몇 년을 견뎌야 했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과연 내가 회복할 수 있다면,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걱정했죠.”
그는 몇 달은 침대에서, 몇 달은 휠체어에서 보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힘든 경험에서 한 가지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제 머리, 제 뇌가 제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며칠 그리고 몇 달을 기억합니다.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어요. 혼자서는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고요.”
받아들임은 슬픔의 중요한 단계다. “어느 날, 저는 일을 해내는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사고 전과 후는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죠.” 쿠비차의 말이다. “가장 좋은 치유책은 운전대에 않는 것이었죠. 차를 몰고,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에요. 실제로 차를 몰기 시작했고, 회복이 더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보통 감사하지 않는 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했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 제 자신에게 작은 목표들을 부여했어요. 당장 이루기는 힘들지만 현실적으로 해낼 수 있는 목표들을 세우고 이루어나가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쿠비차의 싸움은 그에게 레이싱 이외의 삶이 가진 아름다움과 함께, 아마도 아버지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더 단순했던 시절의 즐거움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사람들이 드라이버로서 사고 전과 후를 비교해달라고 자주 묻습니다. 전에는 드라이버로서 항상 이기적인 편이었던 것 같아요. 팀 동료가 가장 큰 경쟁자였죠. 스스로 최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최상의 능력을 끌어내 다른 모든 사람을 이기고 싶다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스포츠에는 도움이 되지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은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사고 10개월 전과 사고 10개월 뒤의 제 모습은 큰 차이가 있었잖아요. 저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감정 없는 삶보다 낫습니다.”
이어서 그는 “아마도 10년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솔직하고 깊이 있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승리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표현을 고민했다. “바로 저예요. 사고 이후의 로베르트요.”
쿠비차는 여러 해에 걸쳐 엘리트 모터스포츠로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세계 랠리 선수권에 복귀했고 2013년 ‘FIA 올해의 인물상’에 선정됐다. 랠리 사고 8년 만인 2019년에는 포뮬러 1에 복귀해 시즌 모든 라운드에 출전했다. 그의 복귀는 여러 언어로 ‘기적적’ 또는 ‘믿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불렸다. 쿠비차는 약팀으로 분류되는 윌리엄스 팀 소속으로 고작 1점을 얻는 데 그쳤지만, 그해 0점을 기록한 신인 팀 동료인 조지 러셀보다 나은 성적이었다. 참고로 조지 러셀은 2025시즌 메르세데스-AMG에서 276점을 기록하며 4위를 기록 중이다. 쿠비차는 이후 내구 레이스로 전향해 2021년 르망 데뷔전을 치렀다.
2025년 6월 15일, 쿠비차는 팀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르망에서 166랩을 달렸는데, 이는 팀이 달린 전체 주행거리의 43%에 해당한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하기 전 59랩을 내리 달렸는데, 식수 공급 시스템이 고장 났던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거리였다. 르망에서의 우승 덕분에 쿠비차와 그의 팀은 세계 내구 선수권 드라이버 순위가 상승했다.
“개별 팀 자격으로 16개월이라는 짧은 준비기간으로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저 자신에게는 물론 무척 열심히 일했던 모든 사람에게도 아주 특별한 결과였습니다.” 2008년 F1에서 단 한 번 우승한 뒤에, 그는 테스트를 위해 유럽으로 즉시 날아갔기 때문에 제대로 축하받지 못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는 꼭 큰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자축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축하는 계속된다. 쿠비차는 이제 겨우 마흔 살이다. 르망에서 다시 우승하기에 충분하다.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비로소 삶의 단순함이 주는 행복을 만끽한다. 깨어나 숨 쉴 때마다, 스스로 신발을 때마다, 경주차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페라리는 499P 모델을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달리는 실험실’이라고 부른다. 서스펜션 마운트에 직접 연결된 3.0L V6 엔진은 카본 파이버와 모노코크 섀시로 만들어졌다.
쿠비차가 몰았던 83번 차는 지난 9월과 10월, 일본과 바레인에서 열린 내구 레이스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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