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46년, 100여 명 학생 이끄는 칠레 유일의 한글학교 유미 교장
영어·스페인어·한국어가 공존하는 교실…"한국어는 곧 정체성"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저 말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다중언어 환경 속에서 한국어는 정체성을 붙잡아 주는 마지막 고리입니다."
칠레 한글학교를 46년 만에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유미(60) 교장. 지난 26일 서울 중구 종이나라박물관에서 열린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마친 뒤 연합뉴스와 만나 '언어는 곧 정체성'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는 2천300명 남짓한 칠레 한인사회에서 100여 명 학생을 꾸준히 지켜내며, 다중언어·다문화 환경 속에서 '한국어 교육의 이유'를 새롭게 설계해 온 지난 10여 년의 여정을 차분히 풀어놨다.
수도인 산티아고 외곽에 자리한 한글학교는 교회 부설 형태가 아닌 한인회가 폐교를 사들여 만든 독립적인 학교다. 운동장과 체육관을 갖춘 '제대로 된 학교'지만, 오래된 건물인 데다 외진 위치 탓에 접근성은 떨어지는 게 한계다.
유 교장은 2011년 선교사로 칠레에 파견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공용어인 스페인어 문맹 상태에서 한글학교 교감직을 맡았다. 교회 활동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칠레 한글학교를 새롭게 세우자"는 결심으로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과제는 교안(授案) 정비였다. "대치동에서 수학 강사로 일한 사교육 경험을 살려 교안을 의무화했습니다. 학기별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명확해졌고, 이에 맞춘 부교재 체계도 완성됐습니다."
이후 출석부·성적표·학급별 수업자료는 모두 구글 프로그램으로 표준화해 관리하고 있다. 학생 평가는 기말고사·태도·수업 참여도 등을 합산해 소수점까지 반영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학부모와의 갈등도 줄고, 교사 참여율도 크게 높아졌다.
학교의 특징은 저학년 '병아리반'만 해도 12명 중 절반가량이 다문화 가정 아동으로, 모국어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교실에서 영어·스페인어·한국어가 다 튀어나옵니다. 영어가 가장 편하고, 그다음이 스페인어, 한국어는 마지막이죠."
학생들의 언어 환경은 가정 형편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은 국제학교로, 그렇지 않은 가정은 스페인어 중심의 현지 학교로 진학한다. 이때 선택한 학교가 아동의 정체성 형성까지 좌우한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학생들은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인식한다"며 한국 역사나 영토 인식도 빈약하다고 했다.
실제로 한 국제학교 도서관에 일본에서 제작한 영어로 만든 독도 교재가 비치돼 있어, 일부 학생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독도 영유권 문제로 교사와 학생 간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학생들은 '현재를 사는 세대'여서 미래를 위한 언어 학습 동기가 낮다. 주말마다 늦잠을 포기하고 학교에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한류 영향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 교장은 한 학생의 변화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문제 학생으로 불리던 아이가 어느 날 아버지와 통화하며 갑자기 한국어로 '아빠, 왜?'라고 했어요. K-문화에 빠지면서 한국인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기 시작한 거죠." 한국 문화 소비가 언어 학습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학생 중 상당수는 한국어·영어·스페인어를 모두 사용한다. 한 학생은 한국에서 대통령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최연소 통역을 맡았다. 특히 유 교장의 두 딸도 이 학교에서 5년씩 보조교사로 봉사했다. 둘째 딸은 3개 국어 구사 능력 덕분에 대학 졸업 전 현대중공업 방위산업부서에 채용됐다.
유 교장은 "남미 시장이 확대되면서 기업은 다중언어·다문화 인재를 찾는다"면서 "한국어는 그 경쟁력을 완성시키는 언어"라고 강조했다.
유 교장은 한글학교 학생들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적응력'과 '협조성'이라고 했다. "한글학교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하고, 협력적이에요. 다중언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두뇌는 유연합니다."
칠레에서는 부유층 가정이 페루·콜롬비아 출신 가정부에게 양육을 맡기면서 부모-자녀 간 언어 단절이 깊어지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그는 "한글학교는 아이의 언어 발달을 세밀하게 관찰해 부모에게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유 교장은 추석 행사 대신 운동회를 열어 많은 한인과 현지인들을 모았다. 도시락 등 음식 판매를 통해 재정을 마련하고, 학부모회는 행사 운영의 든든한 실무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또 산티아고 센트럴대학 한국인 교수진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교육·문화 연계를 확대했다. 학생들은 부채춤·아리랑 등 공연을 통해 한국어 사용 경험을 확장하며 세대 간 교류도 이뤄진다.
유 교장은 듣기 중심 전략으로 한국어능력시험(토픽, TOPIK) 6급 취득률을 높이고 있다. 다만 "자격증과 실제 작문 능력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며 실질적 언어 능력을 키우는 교육 방향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칠레 한글학교는 올해도 재외동포청 주최 연수 프로그램에 학생들을 적극 참여시켜 모국과의 연결을 넓혔다. 한국을 다녀온 학생들의 긍정적 경험은 입소문이 되어 더 많은 학부모가 추천을 요청할 정도로 확산하고 있다.
유 교장은 "재외동포청의 동포 차세대 모국 초청 연수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며 "한글학교는 아이들의 언어·정체성·미래를 지켜내는 최전선"이라고 말했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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