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 = 이재훈 대표기자] 2020년 5월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현 회장)은 국민 앞에 섰다. "더 이상 노조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무노조 경영은 끝났습니다." 반세기를 지배했던 삼성의 철옹성 같은 무노조 신화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2025년 11월. 그 선언으로부터 정확히 5년이 흘렀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평택사업장 곳곳엔 노조 현수막이 걸려 있고, 3개 노조의 조합원 수는 6만5천 명을 넘어서며 전체 근로자의 과반을 돌파했다. 숫자로만 보면 분명 변화다. 하지만 그 이면의 풍경은 어떤가. 2024년 삼성전자는 창사 55년 만에 처음으로 쟁의행위 찬반투표 가결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파업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봉합했지만, 2025년 현재 진행 중인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교섭은 또다시 지난해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교섭 테이블은 열렸지만, 양측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무노조 경영 폐기' 5주년을 맞은 지금, 삼성의 노사관계는 과연 공존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만성화된 갈등 구조로 굳어지고 있는가. 본지는 2024년 파업 위기부터 2025년 현재까지의 데이터와 현장 증언을 종합 분석해 '뉴 삼성' 노사관계의 민낯을 해부한다.
■2024년이 남긴 상흔...'파업 가능한 삼성'의 현실화
2024년 여름은 뜨거웠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임금 협상 결렬을 이유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의 70%가 넘는 압도적 다수가 파업에 찬성했다. '설마 삼성이 파업을 하겠어?'라는 내외부의 안일함은 단숨에 무너졌다. 실제 파업은 막판 협상으로 회피됐지만, 이 사건이 남긴 유산은 컸다. 첫째, 노조의 협상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쟁의권 확보 경험은 노조에게 '실질적 무기'가 있음을 입증했다. 둘째, 사측의 전략적 오판이 드러났다. 과거처럼 '시간을 끌면 노조가 지친다'는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셋째, 조합원들의 결집력이 강화됐다. 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연대감은 2025년 교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3개 노조 공동교섭단, 6만5천 명 시대의 개막
2025년 11월, 삼성전자 노사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전삼노,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노조(초기업노조), 삼성전자노조 동행(동행노조) 등 3개 노조가 공동교섭단을 구성하고 12월 초 사측과의 본교섭에 착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1월 5일 체결된 양해각서를 통해 구성된 공동교섭단의 위력은 숫자로 증명된다. 11월 4일 기준 초기업노조 3만4,781명, 전삼노 2만5,709명, 동행노조 2,072명으로 총 6만5,250명에 달한다. 삼성전자 전체 근로자 12만5,000여 명의 과반을 넘어선 역사적 수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초기업노조가 가장 많은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전삼노가 최대 노조였으나, 최근 조합원 이탈이 발생하면서 초기업노조가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초기업노조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삼성생명, 삼성디스플레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4개 계열사 노조로 구성된 연합체로, 삼성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력을 갖췄다. 전삼노 관계자는 "교섭 대표 노조와 참여 노조가 양해각서 체결을 자주적으로 합의해 공동교섭단을 구성한 것"이라며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2025년 교섭, SK하이닉스 쇼크와 깜깜이 성과급 논란
2025년 임단협의 최대 쟁점은 임금 인상률이 아니다. 진짜 폭탄은 '성과급 산정 방식 개편' 요구다. 그 도화선은 경쟁사 SK하이닉스가 제공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성과급 지급 기준을 대폭 변경했다. 한 해 영업이익의 10% 전부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하면서, 2025년 지급될 성과급이 평균 1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 소식은 삼성전자 직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체계는 복잡하다. EVA(경제적 부가가치) 기반의 기본 성과급에 OPI(초과이익성과급), TAI(목표달성장려금) 등이 더해지는 다층 구조다. 문제는 이 산정 기준이 명확히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OPI는 EVA 방식으로 산정되는데, 이 공식이 불투명해 직원들은 '깜깜이 성과급'이라 부른다. 3개 노조는 공동요구안에서 OPI 산정 근거를 기존 EVA 방식에서 영업이익의 15%로 바꾸고, 성과급을 연봉의 50%로 제한하는 상한제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의 10%를 배분하는데, 삼성은 왜 EVA라는 복잡한 공식으로 성과급을 줄이느냐는 것이 노조의 핵심 논리다. 전삼노 관계자는 "OPI 제도의 지급 기준을 변경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이는 노동조합이 적법한 교섭권을 가지고 쟁의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라고 경고했다.
■2024년 반도체 적자, 그리고 불공정 배분 논란
노조의 분노에는 2024년의 경험이 깔려 있다. 반도체(DS) 부문은 2023년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직원들의 성과급은 대폭 삭감됐다. 반면 임원진의 보수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사업보고서에 공시된 임원 보수 총액을 분석하면, 고위 임원들의 보상 체계는 직원들과 다른 기준으로 운영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회사가 어려울 때 직원들이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고, 회사가 잘될 때 임원들이 먼저 챙긴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초기업노조의 한 간부는 "EVA 방식은 회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며 "영업이익은 명확한 숫자인데, 왜 굳이 복잡한 공식을 쓰느냐. 투명성을 확보하라는 게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노사협의회 vs 노동조합, 끝나지 않은 주도권 싸움
3개 노조가 공동교섭단을 구성한 배경에는 '과반수 노조' 지위 확보라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과반수 노조가 되면 노사협의회를 통한 사측의 우회 전략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 전삼노는 11월 10일 고용노동부에 공식 질의서를 제출하며 복수노조 체제 하에서의 근로자대표 지위 확인 절차에 착수했다. 전삼노 관계자는 "노조는 조합원 수 산정 절차와 관련해, 일부 민간기관의 검증 방식은 객관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라며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고려할 때, 공공기관 없이 산정 절차를 진행할 시 조합원 명부 공개 과정에서 유사한 정보 유출 위험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노사협의회, 노조 무력화의 도구인가
5년이 지났지만, 사측이 노조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핵심은 삼성 특유의 '노사협의회' 중심 문화다. 노사협의회는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에 따라 설치된 협의 기구다. 법적으로 임금 교섭권은 없다. 하지만 삼성은 전통적으로 노사협의회를 통해 임금 인상률 가이드라인을 정해왔다. 노조가 없던 시절의 관행이다. 문제는 2025년에도 이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삼노 관계자는 "노사협의회에서 최근 임금인상률을 발표했다"며 "이번에 노조의 교섭권을 발휘해 사태를 확실하게 매듭지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측이 과반수 노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노사협의회를 통해 임금 가이드라인을 먼저 확정하려 한다는 것이 노조의 해석이다. 고용노동부는 2020년 행정해석을 통해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노조와 우선 협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노사협의회가 노조를 압도하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초기업노조 관계자는 "사측이 노사협의회를 방패막이로 활용해 노조와의 직접 협상을 회피하고 있다"며 "우리가 공동교섭단을 구성한 이유도 사측의 분할 통치 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견제... '정서적·제도적 배제'의 진화
2020년 이전의 삼성은 노조를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와해 공작, 감시, 회유, 협박. 2018년 대법원은 삼성의 부당노동행위를 확정 판결했다. 그런 노골적 행위는 2020년 선언 이후 사라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현장에서는 더 교묘한 형태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언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노동위원회 및 지방노동위원회 자료를 분석하면, 2020년 이후 명백한 부당노동행위 판정 건수는 감소했다. 하지만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한 인사상 불이익, 승진 누락, 핵심 프로젝트 배제 등과 관련된 진정 및 구제 신청은 2025년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 초기업노조 조합원은 익명을 전제로 "노조 활동을 하면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팀장이 '요즘 바쁜데 다른 데 신경 쓰지 말라'고 넌지시 압박한다"고 전했다.
■조직문화 속에 각인된 노조 혐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직문화다. 삼성은 50년 넘게 '노조 없는 경영'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 DNA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특히 중간 관리자 세대는 '노조는 회사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한 삼성전자 임원 출신은 "회사는 공식적으로 노조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노조를 '필요악' 정도로 본다"며 "경영진이 진심으로 노조를 파트너로 여기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정서적 거부감은 제도적 배제로 이어진다.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조는 배제된다. 사업 재편, 구조조정, 복지 정책 등 직원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도 노조와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가 말하는 5년의 성적표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삼성전자의 노사 분규 발생 건수는 2020년 이후 증가 추세다. 2020년 이전에는 공식 분규가 거의 없었다. 2021~2023년에는 소규모 갈등이 산발적으로 발생했고, 2024년에는 쟁의행위 직전까지 갔다. 이는 역설적으로 '건강한 신호'일 수도 있다. 노조가 존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민주적 발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3개 노조의 공동교섭단 구성은 향후 노조 통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전삼노는 현재 초기업노조와의 통합을 추진 중이다. 전삼노 관계자는 "10월 중순에 냈던 합병·통합에 대한 입장은 이번 교섭이 잘 끝나면 다시 논의할 것"이라며 "상급 단체를 탈퇴할지 추이를 더 지켜보고 있다. 아직 통합이 부담스러운 분위기도 느껴져 상황을 더 지켜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약 통합이 이뤄진다면 단일 노조 조합원 수가 6만 명을 넘어서는 초대형 노조가 탄생하게 된다. 이는 삼성 노사관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또한 공개된 데이터는 제한적이지만,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이직률은 최근 몇 년간 증가 추세다. 특히 젊은 세대의 이탈이 두드러진다. 내부 익명 게시판에는 "더 이상 삼성이 꿈의 직장이 아니다", "워라밸도 없고 보상도 기대 이하"라는 불만이 넘쳐난다. 글로벌 직장 평가 플랫폼에서 삼성전자의 평점도 하락세다. 특히 '경영진 신뢰도', '보상 공정성'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는 노사 갈등이 단순히 조합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25년 12월, 신뢰 구축의 마지막 기회
이재용 회장의 2020년 선언은 진정성이 있었을까. 5년이 지난 지금, 그 답은 여전히 유보적이다. 선언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구조적 변화는 미흡했다. 사측은 여전히 정보를 독점하고, 노조는 커진 덩치만큼 강경해졌다. 신뢰는 쌓이지 않았고, 갈등은 반복되고 있다. 2025년 12월 초 시작될 본교섭이 향후 5년을 결정할 것이다. 3개 노조 6만5천 명이 공동전선을 구축한 지금, 사측이 과거처럼 분할 통치나 시간 끌기 전략을 구사한다면 2024년보다 더 큰 충격이 올 수 있다.초기업노조 관계자는 "이번 교섭은 단순히 임금 몇 퍼센트를 올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삼성이 노조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여전히 관리 대상으로 보느냐를 판가름하는 시험대"라고 강조했다.
지금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선언의 반복이 아니다. 데이터로 증명되는 신뢰의 구축이다. 삼성 이재용 회장은 OPI 산정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영업이익 연동 방식을 도입할 수 있고 과반수 노조와 직접 협상 또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한 불이익이 없도록 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실천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의지다. 이재용 회장이 5년 전 했던 약속을 진심으로 지킬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그 약속은 위기를 넘기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했는가. 2025년 겨울, 삼성의 노사관계는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만이 아니라, 신뢰를 지킨 자를 기억한다. 삼성이 진정한 '뉴 삼성'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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