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관문인 당나라 시대 유적인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보러 갔다. 위먼관은 둔황에서 90㎞ 서쪽에 있다. 당나라 시대 만리장성 서쪽 끝은 명나라가 만든 자위관(嘉峪關)보다 500여㎞ 서쪽인 이곳을 위먼관이라고 한다.
둔황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마른 허허벌판 사막의 연속이다. 위먼관으로 가는 중간에 사막에서 희귀한 자연현상인 ‘신기루’를 목격했다. 멀리 사막 앞에 파란 호숫물이 넘실대는 모습이다. 영락없이 푸른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인다. 필자와 아내를 비롯한 일행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기루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다. 빛이 투과되는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신기루라는 단어는 인생의 허무함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신기루 같은 인생’ 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월 하순 작열하는 사막의 위먼관으로 가는 길은 한산하다. 위먼관에 도착하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위먼관’ 표지석과 ‘소반반성’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매표소에서 위먼관 유적까지 불과 300여m 걷는데도 사막의 혹서에 땀이 줄줄 흐른다. 위먼관은 한나라, 당나라 시대 사용하던 최전방 국경 관문, 군대 주둔지, 사신이 묶어가는 ‘역참’ 시설이었다. 역참은 사신이나 전령 등에게 말을 빌려주고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사주에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다’에서 역마살이라는 단어는 역참에서 유래한 것이다.
흙벽돌로 지은 위먼관 망루는 천 수백 년 세월을 잘 이겨내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위먼관의 텅 빈 내부 공간은 지붕은 없어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지붕으로 사용되던 나무로 만든 서까래와 대들보가 삭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위먼관을 감싸는 흙벽의 두께가 어림잡아 2m 이상 돼 적군이 공격해도 끄떡없을 것 같다. 한나라가 처음 만들고 당나라가 보수해 사용했으니 2천년은 됐을 것이다.
위먼관 바로 옆에 유목민들이 침입하면 둔황 사령부에 연락하는 ‘봉화대’ 유적이 들판에 남아 있다. 지금 이곳은 황량한 허허벌판이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군인이나 여행객이 이용하는 오아시스와 군인 가족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위먼관을 나와 70여㎞ 북서쪽으로 이동하면 ‘아단 지질공원’ 또는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지질공원이 있다. 마귀성 가는 길 옆에 중국 우주군 군대 기지의 긴 철조망을 지나간다. 자동차로 철조망 울타리를 통과하는 데 3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미뤄 그 면적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본다. 마귀성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기암괴석 바위 지형이다. 바람 불 때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마귀성이다. 마귀성 관람에 버스로 두 시간 소요된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관람을 포기했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중 하나인 양관을 해지기 전에 들러야 한다.
양관은 둔황에서 서쪽으로 70여㎞ 떨어진 국경 관문이다. 사막의 작은 산봉우리에 토성 형태만 남은 당나라 시대 양관의 흔적이 나타난다. 양관은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양관은 과거 당나라에 들어오는 상인, 여행객 등이 입국할 때 출입증을 받고 출국할 때 출입증을 확인했던 관청이다. 매표소 입구에 한무제 때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양관 건물의 정문에 설치된 현판 휘호가 ‘청뇌헌(聽雷軒)’이다. 한밤중에 멀리 사막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뜻이다. 양관의 남쪽에 눈 덮인 쿤룬산맥이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쿤룬산맥은 중국인들이 도교의 성지로 신성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쿤룬산맥 아랫길로 ‘서역남로’가 있다.
둔황에서 이틀을 보낸 후 아침 일찍 400여㎞ 서북쪽에 있는 하미(哈密)로 향한다. 성(省) 이름이 ‘간쑤성’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변경된다. 서쪽으로 갈수록 건조한 ‘로프사막’의 황량함이 아름다운 고독감과 비장함을 느끼게 만든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으로 끝없는 광활한 사막만 펼쳐져 있다. 로프사막은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이 만나는 중간이다.
‘서역(西域)’은 둔황 서쪽 모든 미지의 땅을 의미했다. 이제부터 서역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오늘 숙박지 하미는 타클라마칸사막 북쪽의 ‘서역북로’가 지나가는 사막 도시다. 하미로 가는 400㎞의 사막길은 오아시스가 거의 없다. 어느 곳은 검은색 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갈이 많이 깔린 사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차량 밖 기온은 43도가 넘는다. 이런 혹서의 사막길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수십일 동안 걸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현장 법사가 서기 629년 가을 하미로 가는 사막길 어려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인적은커녕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해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1천400년 전 현장 법사는 하미로 갈 때 현지인 안내인을 고용해 갔다고 한다. 밤중에 안내인이 강도로 돌변해 위협했다. 현장 법사는 강도로 변한 가이드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고 혼자서 사막을 걸어 갔다. 도중에 식수가 떨어져 사막에서 물 없이 5일을 걸었다. 현장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늙은 말을 죽여 간을 먹었다고 한다.
현장 법사, 혜초 스님의 신발은 가죽으로 덧댄 간단한 샌들일 것이다. 현장 법사의 서역으로 가는 그림을 보면 짐을 가뜩 실은 지게를 메고 한 손에 작대기와 염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신장위그루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고속도로에서 중국 공안(경찰)의 검문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높아진다. 신장의 위구르족 테러 문제가 중국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 피부로 느낀다. 하미까지 400여㎞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동안 여섯 번 공안의 검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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