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광의 고대 이집트 미술과 신화 #10] 돌로 조각된 하늘의 길: 스텝 피라미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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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광의 고대 이집트 미술과 신화 #10] 돌로 조각된 하늘의 길: 스텝 피라미드 이야기

문화매거진 2025-11-27 17:26: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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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로 조각된 하늘의 길: 스텝 피라미드 이야기 / 사진: 한민광 제공
▲ 돌로 조각된 하늘의 길: 스텝 피라미드 이야기 / 사진: 한민광 제공


[문화매거진=한민광 작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사카라(Saqqara)’라는 넓은 고고학 지대가 있다. 번잡한 카이로 중심부에서 차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다. 도시의 소음은 금세 뒤로 멀어지고, 황토빛 들판과 낮은 집들이 이어지는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 아직 발굴되지 않은 사카라의 한 구역. 사람들의 일상과 오래된 유적이 함께 놓여 있는 독특한 장면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아직 발굴되지 않은 사카라의 한 구역. 사람들의 일상과 오래된 유적이 함께 놓여 있는 독특한 장면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사카라 마을 입구에서 만난 주민. 당나귀와 소와 함께 평소처럼 이동 중인 모습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사카라 마을 입구에서 만난 주민. 당나귀와 소와 함께 평소처럼 이동 중인 모습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사카라에 들어서면 풍경부터 어색하게 낯설다. 끝없이 모래만 있을 줄 알았던 땅에는 풀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고, 그 사이로 오래된 돌조각과 부서진 기둥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발굴이 덜 된 구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일상과 고대의 흔적이 한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한쪽에서는 당나귀를 탄 노인이 소를 몰고 지나가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수천 년 전 조각된 얼굴 문양이 흙 위로 올라와 햇빛을 받고 있다. 

사카라의 인상은 바로 이 대비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박물관 안에 정리되어 놓인 것이 아니라, 아직도 땅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장소같다. 오래된 시간이 현재의 삶과 얇은 층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겹쳐 있는 것처럼…

▲ 사카라 조세르 장제단지의 정문 역할을 하는 입구 회랑 외벽. 거대한 돌벽이 규칙적으로 이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사카라 조세르 장제단지의 정문 역할을 하는 입구 회랑 외벽. 거대한 돌벽이 규칙적으로 이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정식 입구에 가까워지면 높은 돌벽이 길게 이어지는데, 이것이 ‘조세르 장제단지’의 입구 회랑이다. 겉모습만 보면 단순한 ‘정문’ 같지만 사실 이곳은 왕이 중요한 의식을 위해 드나들던 특별한 통로였다. 생전에 왕이 걸어 들어가던 길이기도 했고, 죽은 뒤에는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상징적인 출입구 역할도 했다. 멀리서 보면 네모난 벽과 기둥들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돌을 차곡차곡 세워 만든 성벽 같아 압도감이 있다. 직선이 겹치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묵직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 조세르 장제단지 입구 회랑 내부. 파피루스 줄기를 본뜬 돌기둥이 길게 이어진 통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조세르 장제단지 입구 회랑 내부. 파피루스 줄기를 본뜬 돌기둥이 길게 이어진 통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회랑 안으로 들어서면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정면에서 보았던 기둥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흉내 낸 형태인데, 실제 파피루스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흙벽돌로 건물을 짓던 사람들이 새로운 재료인 돌을 만나자, 자신들이 익숙한 식물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와 기둥으로 변형한 것이다. 미숙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실험 정신”에 가깝다. 기둥 표면의 세로 홈은 나일강가의 식물에서 가져온 패턴이고, 기둥 사이의 빛은 이 패턴을 따라 길게 쏟아진다. 이곳이 건축이 아니라 조각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 사카라의 스텝 피라미드 전경. 여섯 개의 계단이 층층이 쌓인 최초의 피라미드 형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사카라의 스텝 피라미드 전경. 여섯 개의 계단이 층층이 쌓인 최초의 피라미드 형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회랑의 마지막을 지나 바깥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시야가 갑자기 트이는 느낌이 든다.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오자 강한 햇빛이 마당 전체를 비추고, 그 중심에 스텝 피라미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기원전 2670년경, 제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를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자 인류가 처음으로 돌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순간의 결과물이다. 사진이나 책에서 수없이 보았던 구조물이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예상보다 훨씬 크고, 돌 하나하나의 질감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멀리 사막 위에 떠 있는 형체가 아니라, 거대한 돌덩어리가 몸을 일으켜 서 있는 듯한 존재감이다. 이집트 사람들이 왜 ‘왕이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상징을 이 구조에 담았는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스텝 피라미드를 보고 있으면 ‘왜 이런 형태를 떠올렸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집트 지형은 대부분 평평한 사막과 완만한 들판이라 이런 ‘계단형’의 실루엣은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이 형태는 분명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왕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고, 그 상승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계단이 생겼다. 층층이 쌓인 이 모습은 신화적 상징이면서 동시에 미술적 표현이다.

▲ 사카라 사막 한가운데서 바라본 스텝 피라미드. 모래 언덕 너머로 계단식 구조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사카라 사막 한가운데서 바라본 스텝 피라미드. 모래 언덕 너머로 계단식 구조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건축적으로 보면 이 피라미드는 과도기적이다. 대규모 석조 기술이 아직 완숙하지 않았고, 돌조각 하나하나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투박하다. 그런데 이 투박함이 오히려 이 건축물의 정직한 부분이다. 마치 잘 다듬어진 예술품이라기보다, 문명을 세우는 사람이 처음으로 돌을 만지며 “이렇게 쌓아볼까?”하고 시도한 흔적 같다. 그 실험이 성공하면서 훗날 쿠푸의 ‘대피라미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시기,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이면 한반도는 신석기와 청동기가 교차하던 시기다. 이집트처럼 거대한 건축물이 등장하려면 사회적 에너지가 한곳에 집중돼야 하는데, 당시 한반도는 분산된 취락 중심의 생활이었다. 반면 이집트는 나일강의 예측 가능한 범람 덕분에 농업이 안정되었고, 그 안정이 인구와 노동력의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조가 손을 대자, 대규모 건축이 가능해졌다. 자연환경과 정치 구조가 건축의 속도를 결정한 셈이다.

▲ 사카라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 저 멀리 나일강 주변의 팜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사막과 강의 경계가 한눈에 드러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사카라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 저 멀리 나일강 주변의 팜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사막과 강의 경계가 한눈에 드러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사카라는 유적지라기보다 문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 같다. 아직 땅속에 남아 있는 구조물들, 수천 년 전에 만들었지만 오늘 햇빛 아래 그대로 드러나는 질감, 그리고 그 옆에서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

스텝 피라미드는 완성된 미술품이 아니다. 완성을 향해 한 단계 올라가려는 문명의 몸짓에 가깝다. 계단은 그 몸짓이 굳어진 흔적이고, 우리는 그 흔적을 오늘 다시 한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돌을 쌓는 일에서 시작된 문명은 지금도 계속해서 ‘다음 계단’을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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