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메모리 시장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AI 서버 업체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 확보에 사활을 걸면서 메모리 업체들의 설비와 인력이 HBM으로 쏠렸고 그 여파로 범용 D램(DDR5·LPDDR5X 등) 공급이 묶이면서 가격이 급등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HBM이 돈이 된다’고 판단해 생산을 몰아준 결과 정작 시스템 전반을 받쳐주는 범용 D램이 부족해지는 구조적 병목 현상이 나타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 HBM 쏠림이 만든 D램 ‘역전 급등’
AI 데이터센터 증설로 HBM 수요가 폭발하면서 메모리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HBM과 최신 DDR5·LPDDR5로 생산 캐파를 재배분한 것이 D램 가격 급등의 출발점이다. 업계 조사에 따르면 HBM은 용량 기준 전체 D램 중 비중은 아직 10% 남짓이지만 매출 비중은 30%를 넘어설 정도로 단가가 일반 D램의 몇 배에 달해 캐파 쏠림을 부추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버·PC·모바일 등에 쓰이는 범용 D램(DDR4·DDR5·LPDDR 계열) 공급이 줄면서 재고가 빠르게 소진됐고 DDR5·LPDDR5 등 고사양 제품을 중심으로 계약·현물 가격이 올 한 해에만 최대 50% 안팎 뛰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각에선 “HBM을 더 만들수록 일반 D램은 더 귀해지는 역설적 시장”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AI 특수의 2차 파급이 전체 메모리 가격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여기에다 중국 CXMT는 물량을 앞세워 한국 D램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DDR5 등 첨단 제품 양산에도 성공하며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며 바짝 추격하고 있다.
◆ 삼성·SK하이닉스의 공급 대응과 전략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과 범용 D램을 ‘투트랙’으로 끌어올리며 공급 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0나노급 6세대(1c) D램 월 생산을 내년 말까지 20만장 수준으로 확대하는 로드맵을 세우고 평택 P4 등 기존 라인 전환과 설비 증설을 병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정은 차세대 HBM4에도 적용될 예정이어서 HBM과 일반 D램을 동시에 늘리며 가격 협상력까지 확보하겠다는 포석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메모리 투자 규모를 전년 대비 대폭 늘리고 첨단 공정 중심으로 D램 설비를 확충하겠다는 계획도 공식화했다. 이미 4분기부터 D램 가격을 최대 30% 인상하는 등 ‘상승 사이클’을 본격화하며 제한된 캐파를 고부가 제품에 우선 배분하는 전략이 병행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TSV(실리콘 관통전극) 캐파를 확대하며 HBM과 1a·1b급 D램 비중을 키우는 한편 AI 서버용 LPDDR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 구성을 조정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 중국 CXMT의 신형 D램 등장...중국발 변수 영향있나
이 와중에 중국 CXMT(창신메모리 테크놀로지스)가 고급형 D램 시장에 전면 도전장을 내밀며 변수로 떠올랐다. CXMT는 최근 베이징 전시회에서 최고 8000Mbps 속도, 24Gb 용량의 DDR5 칩과 최대 10,667Mbps 급 LPDDR5X 시리즈를 선보이며 프리미엄 D램 시장에 정면 도전장을 냈다. 데스크톱·노트북용 UDIMM·SODIMM부터 데이터센터용 모듈, 모바일용 LPDDR5X까지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장악한 상단 시장을 직접 겨냥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만 기술격차는 여전히 뚜렷하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0나노급(5·7나노 공정 포함) 미세 공정에서 DDR5를 생산하고 있는 반면 CXMT는 여전히 28나노 이상 구형 공정에 머물러 수율·전력 효율·원가 경쟁력 측면에서 격차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D램 시장에서도 2025년 2분기 기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세 회사가 합산 90%를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고 CXMT를 포함한 기타 업체가 나머지를 나눠 갖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CXMT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 전략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대규모 금융·세제 지원을 등에 업은 CXMT가 DDR5·LPDDR5X 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제품을 빠르게 내놓으면서 중국 내 PC·스마트폰·서버 업체들의 ‘탈한국·탈미국’ 수요와 결합할 경우 내수·주변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키울 여지가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의 대중 수출규제 탓에 CXMT가 최첨단 AI 서버용 시장에 즉시 진입하기는 어렵지만 중저가 서버·PC·모바일용 메모리에서 가격 공세를 펼친다면 글로벌 가격 사이클을 흔드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CXMT의 기술 추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른 만큼 단순 가격 경쟁보다는 기술 격차와 고객 신뢰를 더 벌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짜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초미세 공정 기반의 저전력·고신뢰성 제품, HBM과 DDR5·LPDDR5X를 아우르는 패키지·솔루션 제안, 장기 공급·공동개발 계약 등에서 중국 업체가 따라오기 어려운 진입장벽을 계속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각국의 보조금·규제 움직임이 메모리 산업에 미칠 파급효과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생산 거점과 고객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정치 리스크 관리’ 역시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는 AI 투자 확대 속에서 HBM과 범용 D램의 동반 수요 증가가 언제까지 지속되고 그에 따라 메모리 호황이 얼마나 길어질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라고 보고 있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증설·제품 믹스 조정에 따른 가격 완충 효과 그리고 CXMT 등 중국 업체들의 기술·수율 추격이 글로벌 메모리 가격과 공급망에 어떤 충격을 줄지가 주요 변수로 꼽힌다.
메모리 가격 급등이 또 다른 ‘슈퍼사이클’의 신호인지 아니면 단기 공급 쇼크에 따른 일시적 과열인지에 따라 K-메모리의 투자·고용·국가 경제 파급력 역시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AI 서버 투자가 예상보다 오래 이어지는 만큼 HBM과 범용 D램이 동시에 타이트한 구도를 보이는 ‘겹호황’이 최소 2~3년은 이어질 수 있다”며 “이 기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얼마나 전략적으로 증설과 제품 믹스를 조정하느냐에 따라 슈퍼사이클의 강도와 수익성이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한스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