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1,450원을 돌파하고 1,470원대 고환율을 유지하자 , 한국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환율은 6거래일 연속 상승해 1,477.1원을 기록했고, 이는 4월 9일 이후 최고치에 해당했다. 외환 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은 결국 정책 당국의 '전면 진화 국면'을 이끌었고 ,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직접 긴급 기자회견에 나서 비상 대응을 선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500원 시대가 '뉴노멀'이 될 수 있다는 비관론마저 확산되던 상황이다.
현재의 원화 불안정은 단순한 대외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환율의 하단을 굳건히 지지하는 한국 특유의 구조적 리스크가 외부 충격과 결합했기 때문이었다.
원화 약세의 '강달러 닻' 구조
글로벌 요인과 긴축의 고착화
원화 약세의 가장 근본적인 외적 요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기조와 이에 기반한 글로벌 달러 강세의 지속이었다. 최근 미국 경제는 서비스업 구매관리자지수(PMI) 예비치가 55.0을 기록하며 시장 전망치를 웃도는 등 견조한 경기 확장세를 지속했다. 이러한 강한 경제 지표는 Fed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을 낮추었고 , 'Higher-for-Longer(더 높게, 더 오래)' 기조가 고착화되면서 달러인덱스는 100선을 상회하는 등 달러 강세가 재차 강화됐다.
전문가들은 "양호한 미국 경기 속 달러 강세가 유지되며 원화의 상대적인 약세 흐름이 불가피하다"고 짚었다. 이러한 외부 요인에 국제 유가 및 원자재 가격의 변동성 확대가 더해지면서 ,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한국의 무역 구조에 추가적인 달러 수요와 비용 상승 압박을 가했다.
3,500억달러(약 514조 5천억 원) 리스크
우선 글로벌 달러 약세 흐름 속에서도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강력히 지지하며 하락 압력을 받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한국 특유의 구조적 리스크, 즉 3,500억 달러(약 514조 5천억 원) 규모의 대미 투자 조달 리스크 때문이다.
이 막대한 금액은 한국 외환보유액의 약 84%에 달하는 규모다. 준정부기관인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 과정에서 이처럼 대규모 달러 조달 수요가 구조적으로 예상된다는 점은 외환시장에서 달러 수요 급증 우려를 낳았고, 이는 원화 약세 압력을 해소하지 못하며 환율의 '하단'을 굳건히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구조적 달러 수요가 외부 충격(강달러)과 결합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을 고착화했고, 이는 최고 정책 당국이 비상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핵심 배경이 되었다.
경제부총리의 '전면 진화' 전략
환율이 1,470원대를 넘어 1,480원(약 1,480원) 돌파 위기에 직면하자 정책 당국은 경고 메시지를 통해 시장 진화에 본격 착수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 "가용한 모든 수단을 적극 활용하겠다"며 강도 높은 경고 메시지를 내놓았다. 이 발언 직후 호가창에 대규모 달러 매도 물량(외환 당국의 스무딩 오퍼레이션으로 추정)이 등장하면서 환율은 단시간 내에 약 15원 수직 하락하며 급격한 변동성을 보였다. 이는 당국이 단순한 구두 개입을 넘어, 실제 외환 보유액을 동원해 시장 과열을 차단하기 위한 선제적이고 강력한 조치를 취했음을 의미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앞서 기자간담회에서도 "주요 외환 수급 주체와 협의해 환율에 과도한 불확실성이나 불안정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밝히며 시장 개입 의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 있다.
더욱 중대한 정책적 전환은 환율 불안정의 핵심 국내 원인인 국민연금 리스크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한국은행, 국민연금공단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가 공식 출범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가 외환시장의 주요 수급 변수로 공식 인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협의체는 국민연금의 '수익성' 확보 임무가 국가 거시 금융안정이라는 최상위 정책 아젠다와 조화될 수 있는 방안, 예를 들어 기준 환율 설정이나 전술적 환헤지 확대 등을 논의하게 된다.
한편 이 4자 협의체의 출범은 거시건전성 정책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거시건전성 정책 논의 시 "한국은행이 보이스를 높여서 정치적인 영향없이 거시건전성 정책이 강력하게 집행될 수 있는 그런 지배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며 정책 조정의 독립성 확보를 역설했다.
기업의 '환차손 늪'과 물가 전가율의 딜레마
고환율 장기화는 한국 기업의 경영 환경을 악화시키고 국가 경제 펀더멘털을 위협하는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거나 외화 부채가 많은 항공(대한항공, 아시아나), 에너지, 철강 업계는 외화 부채 상환 부담 증가와 원자재 구매 비용 증가에 따른 막대한 환차손을 겪었다. 특히 항공업계는 환율이 10원(약 10원) 오를 때마다 수백억 원의 환차손이 발생하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졌고 , 철강 및 배터리 업계 역시 철광석, 리튬 등 핵심 원자재를 달러로 수입하므로 환율 상승이 곧 원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수출 주력 산업조차 고환율의 수혜를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의 대기업들은 장비, 소재, 부품을 해외에서 달러로 구매해야 했고, 환율 상승이 제조 원가 급등을 유발하여 수출을 통한 수익 개선 효과가 상쇄되었다. 이는 외형적 매출 증가라는 착시 효과 뒤에 숨겨진 실제 수익 감소를 초래할 수 있었고, 기업들은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고환율로 인한 원가 급등은 국내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다만 실증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환율 변동이 수입 물가에 미치는 전가율은 하락세를 보였다. 이는 한국 시장 내 가격 경쟁 심화,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 감소, 그리고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기업 내 무역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됐다.
그러나 환율 절하가 수출 경쟁력 강화라는 경기 부양 효과로 이어지는 경로가 약화되고 , 환율 변동이 주로 수입 물가에만 영향을 미친다면, 수입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경기를 과도하게 위축시킬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는 높은 가계부채 비율 등 국내 경제의 금리 민감도를 고려할 때 , 환율의 안정적 관리가 물가 및 금융 안정성 확보에 있어 필수적임을 뒷받침했다.
과거 위기와의 질적 비교 및 국제적 교훈
1997년 vs. 2025년: '고비용 충격'이 요인
1997년 외환 위기는 금융기관들의 막대한 부실채권과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지급 불능 위기(Solvency Crisis)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정부는 부실은행 5개를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등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반면 2025년 현재의 환율 불안정은 질적으로 달랐다. 2025년 3분기 기준 단기외채(만기 1년 이하)는 1,616억 달러(약 237조 6천억 원)로 감소했고 , 핵심 지표인 단기외채/외환보유액 비율은 38.3%로 개선됐다. 또 9월 경상수지는 134.7억 달러(약 19조 8천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며 양호한 대외거래 기조를 유지했다. 따라서 현재의 위험성은 구조적 지급 불능 위험이 아닌, 대외 요인과 내부 구조적 요인이 결합된 '고비용 유동성 충격(High-Cost Shock)'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이 기다리는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유효했던 한미 간의 강력한 외환 공조 의지, 나아가 통화스와프 체결이나 이에 준하는 구체적인 달러 유동성 확보 방안이었다. 한미 재무장관 회담 등 후속 논의에서 구체적인 공조 의지가 보인다면 시장의 불안감은 해소될 수 있으나,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되거나 논의가 지연될 경우 불확실성이 커져 환율은 계속해서 상승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시장은 판단했다.
일본의 사례: 외환시장 개입의 한계
최근 일본 엔화 약세에 대한 정책 당국의 대응은 한국 외환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엔화 가치는 일본은행(BOJ)의 완화적 통화 정책 기조 유지 등으로 인해 8개월래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일본 외환 당국은 2022년 9~10월 총 9조 1천억 엔(약 86조 4천억 원) 규모의 대규모 외환 시장 개입을 단행했고, 최근에도 다시 개입에 나섰다 (한 달간 86조 원 규모 추정). 그러나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미국과 일본 간의 금리 차이가 줄어들기 힘든 상황이므로, 개입 효과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실제 엔/달러 환율은 개입 이후에도 다시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한국 외환 당국의 스무딩 오퍼레이션이 단기적인 시장 심리를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할 수 있으나 , 미국 Fed의 긴축 기조가 유지되고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약 514조 5천억 원) 리스크'라는 구조적인 달러 수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환율 안정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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