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한번 내려다보라. 차가운 금속과 강화유리로 덮인 이 작은 직사각형 기계. 이것은 현대인에게 단순한 통신 도구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기억을 저장한 외부 뇌이며, 당신의 인간관계를 기록한 지도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검색창에 두드려본 비밀 일기장이다. 즉, 스마트폰은 당신이라는 자아가 디지털 형태로 물화(物化)된, 또 하나의 당신 자신이다.
그런데 연애가 시작되면, 기이한 의례가 치러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신뢰라는 명분으로, 이 가장 내밀한 자아의 비밀번호를 상대방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숨기는 게 없어야지.”
그의 이 말은 너무나 로맨틱하고 당연한 요구처럼 들린다. 당신은 망설임 없이, 혹은 약간의 주저함 끝에 잠금 패턴을 풀어준다. 그것이 당신의 투명한 사랑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 순간, 당신은 사랑을 증명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이 거주하는 가장 사적인 영토의 국경을 허물고, 점령군에게 성문의 열쇠를 넘겨준 것이다.
그날 이후, 당신의 디지털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검열관이 입주한다. 당신의 메시지, 당신의 사진첩, 당신의 검색 기록은 더 이상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그에 의해 열람되고, 심판받고, 추궁당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오늘 이 ‘디지털 공유’가 현대 연애에서 가장 위험하게 미화된 폭력이라고 단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신뢰의 확인이 아니라, 디지털 식민지화의 시작이다. 당신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그곳에, 사랑은 결코 깃들 수 없다. 오직 통제와 복종만이 남을 뿐이다.
투명성이라는 감옥: “찔리는 게 없으면 보여줘”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검열할 때 가장 즐겨 쓰는, 그리고 피해자들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논리가 있다.
“네가 찔리는 게 없다면, 못 보여줄 이유가 없잖아?”
이 말은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인다. ‘죄지은 자만이 숨는다’는 오래된 통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즉 ‘나는 너를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딴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폰을 건넨다.
하지만 나는 이 논리가 근본적으로 틀렸음을, 아주 단호하게 지적하고 싶다. 프라이버시는 ‘숨길 죄’가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1. 죄가 없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역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행위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을 잠근다. 그것은 숨겨야 할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안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간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친구와 나누는 시시콜콜한 수다, 회사 상사를 욕하는 뒷담화, 혼자 보려고 저장해둔 웃긴 사진들. 이것들은 죄가 아니지만, 연인에게 낱낱이 공개하고 싶은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범죄 기록’이 아니라, 당신의 ‘사적인격’이다.
가해자의 “찔리는 게 없으면 보여달라”는 요구는, “죄가 없으면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굴복시키려는 폭력이다.
2. 맥락의 거세와 ‘유죄 추정의 원칙’
그가 당신의 폰을 볼 때, 그는 판사의 눈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공정한 판사가 아니다. 그는 이미 당신을 유죄로 추정하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검사에 가깝다.
디지털 기록의 가장 큰 취약점은 맥락(Context)의 부재다. 텍스트는 감정과 뉘앙스를 담지 못한다.
- - 당신이 남자 직장 동료에게 보낸 “감사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자. 당신에게 그것은 사회생활을 위한 의례적인 친절이었다. 하지만 이미 의심의 안경을 쓴 그에게, 그 이모티콘은 명백한 ‘플러팅(flirting)’의 증거가 된다.
- - 친구와의 대화에서 “남자친구 좀 피곤해”라고 쓴 한 줄은, 그 순간의 가벼운 투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배신’과 ‘기만’으로 확정 판결을 받는다.
그는 당신의 폰을 보면서, 자신만의 망상으로 빈 행간을 채워 넣는다. 당신은 결백을 증명하려 폰을 보여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은 끊임없이 오해를 해명하고 사과해야 하는 피고인석에 앉게 된다. 당신의 투명성은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에게 당신을 공격할 무수한 탄약을 제공할 뿐이다.
디지털 판옵티콘: 스스로를 검열하는 영혼
그가 당신의 폰을 강제로 빼앗아 보는 상황만이 폭력은 아니다. 더 깊고 내밀한 폭력은,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당신의 디지털 자아를 검열하고 삭제할 때 완성된다.
미셸 푸코는 감시자가 보이지 않아도 죄수들이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는 원형 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을 이야기했다. 연인 관계에서의 디지털 공유는 이 판옵티콘을 당신의 주머니 속에, 당신의 손바닥 위에 구현한다.
1. 예방적 삭제와 자아의 축소
당신은 그가 폰을 보자고 할 때 일어날 분란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그가 보지 않을 때, 미리 움직인다.
- - 친구들과의 대화방을 수시로 나간다.
- - 오해를 살 만한 사진은 찍지도, 저장하지도 않는다.
- - 인터넷 검색 기록을 습관적으로 삭제한다.
- - SNS에 글을 올리기 전, 그가 싫어할 만한 요소가 없는지 수십 번 검토한다.
당신은 ‘깨끗한 폰’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 깨끗함은 순백이 아니라 ‘공백’이다. 당신의 취향, 당신의 인간관계, 당신의 솔직한 생각이 삭제된 텅 빈 공간. 당신은 그와의 평화를 위해, 당신 자신을 지워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스마트폰 속의 데이터만 삭제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현실 속 자아도 함께 축소된다. 그가 싫어할까 봐 남사친의 연락을 피하고, 그가 오해할까 봐 회식 자리에서 일찍 일어난다. 디지털 검열은 필연적으로 현실의 행동 제약으로 이어진다. 당신은 점점 색채 없는 사람, 그가 원하는 무균실 속의 인형이 되어간다.
2. 안전을 가장한 족쇄: 위치 추적 앱
“세상이 험하잖아. 서로 어디 있는지 알면 안심되잖아.”
젠리, 아이쉐어링, 혹은 아이폰의 ‘나의 찾기’. 커플들은 사랑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기능이, 학대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전자발찌와 다름없다고 본다.
그에게 당신의 위치 정보는 ‘안심’의 도구가 아니라 통제의 도구다.
- - “집이라더니 왜 편의점에 있어?” (100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 - “퇴근했다면서 왜 아직 회사 근처야?” (당신의 야근이나 잡담 시간까지 통제한다)
- - “배터리가 왜 꺼졌어? 일부러 껐지?” (불가피한 상황조차 의심의 근거가 된다)
당신은 지도 위의 점이 되어 24시간 감시당한다. 어디를 가든 그의 시선이 따라온다는 감각은, 당신에게서 ‘혼자 있을 자유’를 박탈한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공간을 확보할 때만 비로소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GPS 공유는 당신에게서 그 마지막 피난처마저 빼앗아간다. 당신은 물리적으로 혼자일 때조차, 심리적으로는 감금된 상태다.
이제 우리는 ‘신뢰’라는 단어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뢰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증명’이다. 끊임없이 증거를 요구하고, 알리바이를 대야 하는 관계는 법정이지 연인 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신뢰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당신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폰을 열어보지 않아도,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는 힘.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그 용기야말로 진짜 신뢰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지금 폰을 보여달라는 그의 요구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찔리는 게 있어서가 아니다. 당신의 존엄성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정당한 경고음이다.
비밀번호를 바꾸어라. 위치 공유를 꺼라. 그는 화를 낼 것이다. “변했다”, “수상하다”, “바람 피냐”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변화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권이 상실되는 것에 대한 공포의 발작이다.
그 비난을 견뎌내야 한다. 스마트폰의 잠금 화면은, 그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의 문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고유한 세계를 지키는 국경의 문이다. 그 문을 닫아거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엄한 인간임을 선언하는, 가장 적극적인 자기 수호의 행위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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