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X파일 11화] 서경배 회장, K뷰티 신화의 재건축 VS 몰락 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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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X파일 11화] 서경배 회장, K뷰티 신화의 재건축 VS 몰락 서곡

CEONEWS 2025-11-26 19:12: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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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CEONEWS=이재훈 기자] 2017년 어느 봄날,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한국 재계의 정점에 서 있었다. 주식 부호 순위 1위. 이건희 삼성 회장마저 제쳤다.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액면분할 전 환산 기준 수백만 원을 호가하며 '황제주'로 군림했다. 중국 백화점마다 '설화수' 매장 앞엔 긴 줄이 늘어섰고, '쿠션 팩트'는 글로벌 뷰티 업계의 표준이 됐다. 그로부터 불과 6년. 2023년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전성기의 3분의 1 토막이 났다. 중국 시장 점유율은 급락했고, 국내에선 인디 브랜드들이 치고 올라왔다. 한때 K-뷰티의 상징이던 '공룡' 아모레퍼시픽은 휘청거렸다. 서경배 회장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9,351억 원을 쏟아부어 '코스알엑스' 인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과연 이것은 제2의 창업을 위한 전략적 선택일까, 아니면 몰락을 늦추는 필사적 발버둥일까. 대한민국 뷰티 산업의 역사 그 자체인 서경배 회장의 리더십과 전략, 그가 마주한 명과 암을 해부한다.

■은둔형 장인, 30년 외길의 DNA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1963년생인 서경배 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 경영인이다. 하지만 그를 정의하는 건 학벌이 아니라 '현장'이다. 1987년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 입사 후 그는 지독한 현장주의자로 살아왔다. 업계에선 그를 '모공 회장'이라 부른다. 신제품이 나오면 반드시 직접 사용하며 화장품 입자의 크기, 피부 흡수력, 발림성까지 꼼꼼히 체크한다. 한 전직 임원은 "회장님 앞에서 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할 땐 모든 데이터를 외워야 했다. 성분 하나하나, 입자 크기 하나하나 물어보셨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품질 집착은 아모레퍼시픽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 형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이 건설과 금융을 맡고, 서경배 회장이 화장품을 물려받은 것은 재계의 유명한 일화다. 두 형제의 분업은 성공적이었고, 서경배 회장은 30년 가까이 뷰티 외길을 걸으며 아모레퍼시픽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역발상의 승부사, 위기를 기회로

서 회장의 진가는 위기 상황에서 빛났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대부분의 기업이 구조조정에 매달릴 때 그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프리미엄 한방 화장품 '설화수'를 론칭한 것이다. "모두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경제가 무너지는데 고가 화장품을 누가 사겠냐고요." 하지만 서 회장의 판단은 옳았다. 설화수는 '명품 화장품'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한국을 넘어 중화권 여성들의 워너비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인삼, 자음단 등 한방 성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고급스러운 패키징으로 포장한 전략은 적중했다. 2008년엔 또 한 번의 혁신이 있었다. '아이오페 에어쿠션' 출시다. 튜브나 펌프가 아닌 스탬프 타입의 파운데이션은 전 세계 메이크업 트렌드를 바꿨다. 입생로랑, 랑콤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아모레의 쿠션 기술을 모방하거나 로열티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K-뷰티가 단순한 모방이 아닌 '혁신의 주체'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황금기의 정점, 그리고 추락

2010년대 중반, 아모레퍼시픽은 황금기를 맞았다. 중국 내 한류 열풍과 맞물려 설화수, 라네즈, 이니스프리 등 아모레 브랜드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명동 로드숍 앞에 줄을 섰고, 면세점 매출은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서경배 회장의 자산은 12조 원을 넘어섰고, 그는 이건희 회장을 제치고 주식 부호 1위에 올랐다.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40만 원대(액면분할 전)를 돌파했다. 이때가 바로 서경배 회장과 아모레퍼시픽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하지만 이 영광은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이 중국과 중국인 관광객에 집중돼 있었다. 차이나 리스크에 대한 경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너무나 달콤한 중국 시장의 유혹 앞에서 위기관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사드 보복, 그리고 무너진 성

서경배 회장은 코스알액스을 인수하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서경배 회장은 코스알액스을 인수하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17년 3월, 한국의 사드 배치를 이유로 중국의 보복이 시작됐다. 한류 콘텐츠 금지, 단체 관광 중단. 아모레퍼시픽은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 매출이 급감했고, 면세점 재고는 쌓여갔다. 더 큰 문제는 중국 로컬 브랜드의 부상이었다. 완미일기(完美日记), 화서자(花西子) 같은 C-뷰티 브랜드들이 공격적인 마케팅과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잠식했다. '궈차오(国潮·국산품 애용)' 열풍까지 불며 중국 소비자들은 자국 브랜드로 눈을 돌렸다. "아모레 아니면 안 된다"는 자만심이 변화하는 시장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국 법인의 현지화는 더뎠고, 디지털 전환은 늦었다. 왕홍(인플루언서) 마케팅과 라이브 커머스가 대세가 된 중국 시장에서 아모레는 한발 늦었다.

■국내 시장마저 흔들리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시장도 요동쳤다. CJ올리브영으로 대표되는 H&B(헬스앤뷰티) 스토어가 유통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 안에서 바이오더마, 라로슈포제 같은 더마 코스메틱과 토리든, 메디힐, 닥터자르트 같은 인디 브랜드들이 급성장했다. MZ세대는 더 이상 대기업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성분, 효과, 가성비를 따지며 '현명한 소비'를 추구했다. SNS와 유튜브에서 정보를 찾고, 리뷰를 보며 제품을 선택했다. 아모레퍼시픽의 거대한 로드숍(이니스프리, 에뛰드) 중심 전략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높은 임대료와 인건비를 감당해야 하는 오프라인 매장은 수익성이 악화됐다. 매장 수를 줄였지만, 그 사이 온라인 채널 장악은 늦어졌다.

■황제 경영의 그늘

일각에서는 서경배 회장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30년 가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만들어진 경직된 조직 문화. 실무진의 직언이 위로 전달되지 않고, 오너의 직관에만 의존하는 의사결정 구조가 변화 대응을 늦췄다는 비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서 회장은 제품 하나하나는 꼼꼼히 보지만, 전체 시장 트렌드를 읽는 데는 약했다"며 "조직 내부에서 '회장님이 좋아하실까?'가 판단 기준이 되다 보니 혁신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반격의 칼날, 9,351억원 코스알엑스 베팅...창사 이래 최대 승부

벼랑 끝에 몰린 서경배 회장이 2023년 꺼내 든 카드는 과감한 M&A였다. 스킨케어 브랜드 '코스알엑스(COSRX)'의 잔여 지분을 인수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한 것이다. 총 9,351억 원이 투입된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베팅이었다. 코스알엑스는 2013년 설립된 토종 브랜드로, 여드름·모공 케어 제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북미 시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며 '아마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매출의 90% 이상이 해외, 그중에서도 북미와 동남아에서 나온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아모레퍼시픽과 정반대 구조다.

이 인수는 두 가지 전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탈(脫)중국이다. 중국에서 빠진 매출을 북미 시장에서 메우겠다는 명확한 의도다. 코스알엑스는 이미 북미에서 탄탄한 유통망과 브랜드 인지도를 확보했다. 아마존, 울타뷰티, 타겟 등 주요 채널에 입점해 있고,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성비 좋은 K-뷰티'로 입소문이 났다. 둘째, 디지털 DNA 이식이다. 코스알엑스는 온라인 채널 중심으로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 브랜드다. SNS 마케팅, 인플루언서 협업, 데이터 기반 제품 개발에 강점이 있다. 오프라인 중심의 '공룡' 아모레에게 절실한 역량이다. 서 회장은 이 인수를 통해 과거의 '유기적 성장(Organic Growth)' 방식에서 벗어나, 잘하는 기업을 사들이는 과감한 투자 전략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줬다.

■AI와 ESG, 미래를 위한 포석

서경배 회장의 반격은 M&A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모레퍼시픽을 단순한 화장품 회사가 아닌 '뷰티 테크 기업'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AI 커스터마이징이 대표적이다.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서 혁신상을 받은 '톤워크'는 AI 기술로 개인의 피부톤을 분석해 딱 맞는 파운데이션을 즉석에서 제조한다. '코스메칩'은 피부 상태를 진단하고 맞춤형 제품을 추천하는 AI 솔루션이다. 초개인화 시대에 맞춘 서 회장의 기술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ESG 경영도 강화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창업주 서성환 선대 회장의 이념을 계승해, 플라스틱 사용 절감과 리필 스테이션 확대를 추진 중이다. 2030년까지 플라스틱 사용량을 50% 줄이고, 재활용 소재 비중을 50%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다. 이는 글로벌 투자 트렌드인 ESG 기준을 충족하는 동시에,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전략이다. 실제로 아모레퍼시픽의 ESG 등급은 국내 화장품 업계 최상위권이다.

■진정성인가, 생존 본능인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 회장은 최근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우리의 소명은 사람을 아름답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며 '뉴 뷰티(New Beauty)' 비전을 강조했다. 아름다움의 정의를 외형을 넘어 건강, 웰빙, 지속가능성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유보적이다. 코스알엑스 인수가 단기 실적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본진인 설화수와 라네즈의 브랜드 리브랜딩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아모레의 부활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주가는 아직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인수 효과가 나타나려면 최소 2~3년은 지켜봐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실제로 코스알엑스의 2024년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북미 시장 경쟁 심화와 환율 변동이 발목을 잡았다.

서경배 회장에게 묻고 싶다. 과거의 영광인 중국 시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가? 거대한 조직을 파괴적으로 혁신하여 날렵한 스타트업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30년 가까이 유지해온 절대 권력을 내려놓고, 젊은 인재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가?

지금 서경배 회장에게 필요한 것은 꼼꼼하게 챙기는 '관리의 리더십'이 아니라,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혁신의 리더십'이다. 아모레퍼시픽이 'K-뷰티의 맏형'으로서 자존심을 회복할지, 아니면 흘러간 옛 유행가처럼 잊혀질지는 오직 그의 결단에 달려 있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 한때 주식 부호 1위였던 서경배 회장이 다시 한번 신화를 쓸 것인지, 아니면 변화에 둔감한 황제로 기억될 것인지. 소비자와 투자자는 냉정하다. 기다려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서경배 회장 프로필>
- 1963년생
- 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
- 1987년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 입사
- 1997년 대표이사 부회장 취임
- 2003년 대표이사 회장 취임
- 주요 업적: 설화수 글로벌화, 쿠션 팩트 개발, 아시아 뷰티 기업 최초 뉴욕 5번가 매장 오픈

이재훈의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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