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문화 연구소와 갤러리, 찻집으로 운영 중인 로해. 중앙에 걸린 현판 ‘화개시서려(和開是序廬)’는 ‘조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학자의 초막’을 뜻하며, 소박함과 비움을 실천한 조선 다인의 정신이 느껴진다.
조선 초기 문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남긴 김시습. 그는 문학 못지않게 차의 이론과 제다(製茶)에 높은 식견을 가진 수행자였다. 차생활의 전 과정을 기록한 시집 〈매월당집〉을 보면 초가에서 직접 재배한 차를 끓여 마시며 수행을 이어가던 그의 소박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 그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이가 있다. 김시습의 18대 후손이자 한국차문화 연구소 겸 갤러리 로해의 김동현 대표다. 그는 선조에게서 이어받은 문화유산을 토대로 한국 전통차의 본질을 살피고, 한국적 미학을 지금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로해의 찻물은 화로에서 숯으로 끓여내 더욱 깊은 감칠맛을 자랑한다.
=전통 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요소인 봉창. 공간의 정적인 시각 장치로 활용했다.
온지음, 신세계 더 헤리티지 등 여러 기업과 기관에서 차 문화 컨설턴트로 활동해 왔다. 연구와 기획을 넘어 로해를 만들게 된 배경은
한국의 차 문화를 콘텐츠로 개발하고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차가 삶 속에 실제적으로 녹아드는 ‘연결’에 의미가 있다고 봤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이 일상에서 한국차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전시로 역사를 보여준다면, 로해는 생활 속에서 전통 미학이 자연스럽게 ‘체현화’되기를 바란다. 보통 ‘체화’라 하지만 여기에 ‘현(現)’을 더해 실제 삶에서 드러나고 반영되는 상태를 추구한다.
‘이슬의 기운’을 뜻하는 로해.
로해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김시습의 시집 〈매월당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김시습이 차를 ‘일상의 여유를 회복하는 매개’로 삼았던 철학은 로해가 지향하는 가치의 바탕이다. 〈매월당집〉에는 차와 관련된 시만 73수에 달할 만큼 그가 차 문화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생생히 드러난다. 조선 후기에 초의선사가 차 문화를 부흥시키기 이전부터 김시습은 차나무를 키우고, 차를 보관하며, 손님에게 내어주는 등 차생활의 전 과정을 실천해 온 인물이다. 억새를 엮은 초가집에서 방 안에 땅을 파 질흙으로 화로를 만들고, 그곳에 솔방울을 넣고 끓여 차를 우려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의 질박하고 검소한 삶의 방식은 일본의 차성인 리큐의 와비사비 다실이 등장하기 100여 년 전의 일이다.
김시습의 시집 〈매월당집〉에 드러난 ‘망형(忘形)’ 철학이 로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로해’라는 이름도 선조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들었다.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로해는 한자 그대로 ‘이슬(露)’과 ‘이슬의 기운(瀣)’을 뜻한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호이기도 한데, 로해가 지향하는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예부터 선인들은 차를 ‘이슬’에 비유해 왔다. 불교에서도 이슬은 부처가 중생을 구제할 때 하늘에서 내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만물을 적시고 생명을 돋우며, 마음을 맑게 해주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런 이슬의 이미지가 차의 본질, 로해가 지향하는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봤다. 선인의 겸허하고 맑은 정신성을 오늘의 삶에도 온전히 이어가고 싶다.
김시습의 18대 후손인 김동현 대표는 한국차 문화의 본질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로해를 설립했다.
청담동이라는 입지가 의외다. 무릇 전통문화 관련 공간이라면 북촌이나 서촌이 먼저 연상되는데
유서 깊은 동네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겐 ‘강남’과 ‘전통’이라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 조합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지역 한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봤다. 마침 지금의 건물을 알게 됐고, 번잡함에서 살짝 벗어난 이 골목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부터 점점 조용해지는데, 로해에 들어섰을 때도 그 고요함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면 한다. 공간에 일관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커다란 액막이 명태가 걸린 입구. 김시습의 〈매월당집〉 옆에는 조선시대 때 제작된 장롱과 등잔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흙벽이나 봉창 등이 전통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데
로해는 궁중 문화보다 서민이 살던 초가집을 통해 일상의 소박한 미학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품으면서 견고한 흙벽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랜 연구와 현장 답사를 진행했다. 상주나 예천, 안동 지역에서 채취한 흙을 3년간 물에 숙성한 뒤, 다시 해초 풀과 마섬유 등을 섞는 과정을 거쳐 구현해 냈다. 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요소인 봉창도 반영했다. 틀이 없는 고정형 개구부로, 공간에 빛과 소리를 끌어들인다. 이 외에도 짚풀을 엮은 듯 직조한 카펫, 조선시대 때부터 사용한 나무 장과 민속품을 통해 담백함과 비움을 실천한 조선 다인의 정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동의 소규모 다원에서 만든 작설차와 봉황 무늬를 새긴 작설 저고령당.
로해가 바라보는 ‘차’의 본질은
차는 음료 차원을 넘어 역사와 철학, 미학이 응축된 하나의 종합예술에 가깝다. 찻자리를 어떻게 펼칠지, 어떤 기물을 고를지 같은 선택에는 한 사람의 태도와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차는 문화의 단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깊고 풍부한 매개다.
처음 선보인 ‘작설’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했나
‘작설’은 〈매월당집〉과 정약용의 간찰에서 착안했다. 선인들은 다도를 통해 ‘나’를 잊고, 나아가 형식마저 내려놓는 ‘망형(忘形)’의 태도를 실천했다. 이 기록에 묘사된 전통 제다 방식에 따라 작설차를 만들었다. 손님들이 직접 작설차를 맛보면서 조선 선비의 태도와 사유를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구성했다. 차와 함께 곁들이는 다식은 조선 후기 문헌에서 ‘저고령당’으로 불렸던 초콜릿을 선택해 현대적 터치를 더했다. 소반이나 도자기, 곱돌화로 등을 다실에 배치해 단순히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를 둘러싼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을 전하려고 했다.
제주 전통 가옥에서 사용하던 참죽나무 계단을 오브제처럼 활용했다.
로해에서 소개하는 한국차의 산지와 형태가 다양한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차라면 흔히 보성이나 하동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국내에는 훌륭한 차 산지가 많다. 김해, 부산, 순천, 남해, 장흥, 강진, 나주 등 남부 지방 곳곳에서 개성 있는 차를 생산하고 있다. 로해에서도 하동뿐 아니라 장흥과 강진 지역의 차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장흥의 오랜 전통차인 ‘청태전’은 한국 병차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 잎을 떡처럼 뭉쳐 만든 차로, 물에 넣어 끓이거나 부스러뜨려 우려내는 방식이다. 로해는 이런 전통 병차 형태가 한국차의 중요한 강점으로 보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전기가 아닌 화로에서 숯을 이용해 물을 끓이는 방식은 어떤 이점이 있는지
참숯으로 물을 데우면 물 분자가 움직이는 방식이 전기열과 다르다. 시간이 걸리고 과정도 번거롭지만, 이렇게 끓인 물은 훨씬 부드럽고 또렷한 맛을 내 차의 풍미를 높여준다.
양양 낙산사에 큰 화재가 났을 때 떨어진 소나무 가지로 기둥을 만들었다. 해풍을 맞아 자연스럽게 꼬인 나무에는 ‘인고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로해에서 사용하는 다기는 모두 한국 공예가와 협업해 선보인 ‘로해 컬렉션’의 일부다
로해는 현재 최소정, 이명균, 권대섭 작가와 함께 만든 기물을 소개하고 있다. 맑고 푸른 비취색을 띠는 비색을 재현한 고려 다완과 절제된 아름다움과 단순미를 지닌 백자 다관 등이 있다. 로해 컬렉션은 티 테이스팅 프로그램에서 경험해 보고, 원한다면 구매도 가능하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예정인가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기관이 궁중 문화나 양반 문화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로해는 일반 민중의 삶에 주목하고자 한다. 소박한 일상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을 공간과 기물로 풀어낼 계획이다. 또 매년 두 차례 기획전을 열 것이다. 다음 전시는 ‘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초점을 맞춰 전통 제다 과정의 흐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 겨울 시즌에는 로해만의 유자숙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제철의 향과 기운을 담은 따듯한 차를 통해 계절의 리듬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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