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엄벌'에 밀려난 예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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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엄벌'에 밀려난 예방정책

이데일리 2025-11-25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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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 지난 6일 울산화력발전소 보일러 타워 붕괴로 노동자 7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와 관련해 노동부 장관은 제일성으로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적극 추진해 철저히 사고 원인을 규명하겠다”고 했다. 현 정부의 제재 일변도 정책 기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이다.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유족들께 죄송하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정책을 면밀하게 살피겠다”와 같은 말은 없었다. 이런 발언의 밑바탕에는 모든 책임이 재해 발생 기업에 있고 기업을 ‘엄벌’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렸다.



엄벌주의가 범죄 억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많은 사상가가 줄곧 지적해 왔다. 이들은 무분별한 엄벌주의를 경계하면서 충실한 예방 지도와 계도, 안내와 같은 예방정책을 통해 국민이 법 위반을 부끄러워할 정도로 충분히 알리고 법을 잘 준수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자는 “법으로 인도하고 처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처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워하지 않고 겉만 고칠 것이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백성은 잘못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몽테스키외 역시 “지키기 어려운 법을 강요하면 백성은 법을 피하려고만 하고 법을 위반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돼 법의 규범력이 무너진다”고 경고했다. 근대형법의 아버지 체사레 벡카리아는 “불명확한 법은 범죄를 부채질하는 최악의 법이고 확실한 처벌을 위해선 관대한 입법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현실주의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조차 “끊임없는 제재로 사람을 공포와 의혹에 몰아넣는 것은 유해를 넘어 위험하다”고 일갈했다.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예측 가능성과 이행 가능성이 결여된 법으로 처벌, 그것도 엄벌을 능사로 여기면 국민은 공포 분위기 때문에 법을 따르는 척하지만 법을 위반하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돼 법의 신뢰가 무너지고 법 위반을 줄이지 못할 거라고 경계했다.

독일의 유명한 형법학자인 프란츠 폰 리스트가 “최선의 형사 정책은 사회 정책이다”라고 갈파했듯이 산업안전에서 최선의 형사정책은 산업안전의 사회정책에 해당하는 예방 법정책의 올바름에 있다. 기업의 행동규범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재해를 되레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산업안전 관계법을 제재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올바른 예방 법정책의 중요성은 일반형사 영역보다 산업안전 영역에서 더 강조된다. 재해는 일반형사사건과 달리 실제로는 위험한데도 위험한지 몰라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부러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는 경우는 없다. 예방 주체들이 무엇이 위험하고 어떤 안전조치를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예방 법정책의 충실한 작동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손 놓은 채 엄벌에만 안이하게 의존하면 형식적 안전을 부추기고 재해를 오히려 늘릴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막대한 행정자원을 투입하면서도 왜 재해가 줄어들지 않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주무 부처조차 판단하기 어렵고 준법 의지가 있어도 준수할 수 없는 예방 법을 정비하지 않고는 아무리 제재를 강화한들 재해를 줄이지 못할 것이다.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묻지마’식 규제와 엄벌로 대응하는 것은 사고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엉성하고 조잡한 예방 법정책을 실효성 있게 개편해 유사재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고 유족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이다. 이번 울산화력발전소 사고가 정부의 제재 일변도 정책 기조를 대전환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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