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충격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내성적이면서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을 지닌 짐 자무시는 최근 감독, 각본, 영화음악을 맡은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1980년대부터 〈천국보다 낯선〉 〈다운 바이 로〉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영화의 규칙을 재정립하고, 어딘가 환멸적이거나 무감각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생동감을 가진 캐릭터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며, 그들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따라갔던, 이 미국의 독립영화 감독에게 예상치 못한 상이 수여된 것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자무시가 직접 고른 도시인 파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쿨함’ 그 자체이면서도 수줍음과 장난기가 뒤섞인 면모를 보였다.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중요한 것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자신의 예술 원칙으로 삼은 사람답게.
그는 류트 연주자 요제프 반 비셈과 함께 음악 프로젝트 그룹 SQÜRL을 이루기도 했으며, 콜라주 포토북 〈Some Collages (Anthology Editions)〉을 출간했고,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시집’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영화제작에서도 정해둔 루트보다는 직관에 따라 나아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가 원하는 바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다.
미국, 더블린, 파리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옴니버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화려한 출연진들과 함께 가족 역학에 대한 공감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그들의 감정 고조가 절정에 도달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마치 물이 천천히 차오르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가슴에 닿아 마음이 움직이는데, 왜인지는 알 수가 없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누군가 이런 은유로 평을 해주셨어요. 정말 마음에 들었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감상이 아마 제가 하는 말보다 타당할 겁니다.” 짐 자무시의 설명이다.
당신의 세계 속에서 시(詩)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저는 뉴욕에서 학교(컬럼비아대학교)를 다닐 때 케니스 코크와 데이비드 샤피로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뉴욕파 시인들이 저의 대부와 대모들이라고 할 수 있죠. 제 활동의 거의 모든 부분은 프랭크 오하라가 1959년에 발표한 인격주의 선언문(Personism A Manifesto)에서 영감을 받았고요.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사랑을 위해, 친구를 위해 시를 써라. 선언문처럼 온 세상을 위해 쓰지 말고. 그러면 더욱 내밀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뉴욕 학교는 항상 유머에 주의를 기울이고, 선배들을 기리곤 합니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첫 번째 편에 등장하는 사진 속 ‘어머니’는 바로 시인 앤 월드먼(Anne Waldman)입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건 그녀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정말 놀라운 시인이죠.
지금 뉴욕의 독립영화 신은 어떤가요?
진정한 공동체는 더 이상 없다고 할까요. 동료와 친구들은 흩어졌고, 우리 집단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선 생활비가 너무 많이 올라서 젊은이들이 살기 힘들어졌어요. 1980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죠. 요즘은 가끔 젊은 감독들 작품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주로 옛날 영화들을 연구합니다. 검열 이전의 1920년대와 1930년대 무성영화에 푹 빠져 있어요. 성적인 암시가 짙지요.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중국 영화들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뮤지션으로서의 통찰력이 당신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혹은 다른 뮤지션들이 당신 영화에 통찰력을 불어넣기도 하나요?
몇 년 전, 저는 영화를 편집하고 있었어요. 친구인 톰 웨이츠를 만나러 갔을 때였는데, 그가 피아노에 앉자마자 아름다운 소리가 그 공간을 가득 채웠어요. 저는 그 영화 작업에 2년 동안이나 매달려왔는데, 순식간에 정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음악이란 바로 그런 거죠. 가장 마법 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대부분의 경우 단체 활동이라는 게 저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지만, 음악적인 그룹 활동이나 영화를 찍을 땐 그렇지 않아요. 저는 우리가 분리된 의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인식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따릅니다. 일찍이 에르빈 슈뢰딩거나 테렌스 매케나가 논의했듯이요. 불교의 어느 이야기에, 한 남자가 아들을 산 정상에 데려가서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네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죠.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요?
에너지는 파괴될 수 없고, 어쩌면 우리는 우주의 에너지장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죠. 예를 들어 기공이나 태극권 수련을 마치면 마치 정화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육체적으로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신기한 방식으로 저에게 돌아오거든요. 내가 그들을 생각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제가 그들에게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인 거죠.
이번에 부모와 자식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유는 뭐였나요?
가족은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통 배우들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씁니다. 톰 웨이츠의 아들 역에 애덤 드라이버를 생각해두고 적어놨어요. 작은 디테일들을 모아서 빠르게 써 내려갔는데, 총 3주가 걸렸죠. 저는 대본대로 촬영하지 않고 배우들에게 즉흥적으로 연기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대본에 충실하기로 했어요. 정말 훌륭한 캐스팅이었습니다. 마임 바이알릭, 애덤 드라이버와 함께 첫 촬영을 마쳤는데 톰 웨이츠가 저를 따로 불러서 물었어요. “진짜 킬러 두 명을 데려온 거야?” 그만큼 집중력이 대단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나요?
아직이요. 기다리고 있어요. 세르주 갱스부르는 “저는 아직도 십대입니다. 제 약점이자 강점이죠”라고 말했죠. 저도 비슷해요. ‘영화라는 복잡한 언어’를 익히려고 노력 중입니다. 유창하게 말하는 건 아직도 어렵거든요.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에 대가가 따르나요?
창의성은 선물과 문제를 동시에 가져다주죠. 몸이나 마음이 항상 다른 곳에 있으면 정서적인 유대 관계를 맺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게다가 촬영 기간에는 마치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다가 끝나고 나면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이상한 일이에요. 제가 연출하는 영화에서 배우들은 어떤 의미로 제 자식과도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다고 할지라도요. 그들에게는 지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플레이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고, 신이 끝나자마자 즉각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컷’ 소리가 나오면, 제가 배우들을 따로 불러 이야기할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번 영화의 모든 에피소드에 스케이터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제가 스케이터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즉흥적이고, 종종 논바이너리이며, 제멋대로이고, 족(族)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뿌리와 문화적으로 연결돼 있고요. 빈 수영장이 있는 집에 침입했던 장면은 비록 범죄행위이긴 했지만 동시에 즐거운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영화에서 유일한 특수효과를 그 장면에 넣었습니다. 바로 슬로모션인데요. 마치 새 떼가 날아오르기 전 잠시 준비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이야기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뉴욕의 공원에 가만히 앉아 스케이터들의 묘기를 구경하는 걸 좋아합니다.
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을 때가 많지 않나요?
저는 반문화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당신은 계속 스스로를 아마추어라고 규정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마추어는 사랑에서 시작되지만, 프로는 돈 버는 데에 얽매여 있잖아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어요. 특정 계층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더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제 영화에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술적 통제력을 완벽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이번 영화를 생 로랑과 공동 제작했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그가 가진 화려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는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존중했고,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어요.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단편영화도 촬영했는데, 영화와 디자이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죠. 제가 안토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생 로랑의 과거를 포용하면서도 거기에 자신만의 색깔을 더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예술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보통은 사람들이나 영화사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죠.
소위 ‘현실 세계’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현실 세계’라는 것이,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파괴적인 사회질서라고 해석합니다.
모든 의류와 액세서리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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