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이 ‘연방준비제도’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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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은행이 ‘연방준비제도’가 된 이유

월간기후변화 2025-11-24 10:26:00 신고

▲ 워싱턴 D.C.의 연준 이사회, 전국 12개 지역에 흩어진 연방준비은행    

 

미국의 중앙은행이 ‘Federal Reserve System’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을 갖게 된 과정은 단순한 금융 제도 설계의 결과가 아니다. 연준은 미국의 건국 철학, 지역주의, 금융 위기, 그리고 거대 자본과의 충돌이 켜켜이 쌓여 탄생한 독특한 구조물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한국은행’, ‘일본은행’처럼 단일 중앙은행 체계를 채택한 것과 달리, 미국만은 굳이 ‘연방준비제도’라는 복합적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긴 여정을 따라가 보면, 연준의 구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나아가려 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된다.

 

연준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구성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연방준비제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워싱턴 D.C.의 연준 이사회, 전국 12개 지역에 흩어진 연방준비은행, 그리고 기준금리 결정을 담당하는 FOMC. 이 구성 자체가 미국의 정치적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앙에 모든 권력이 쏠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미국은 중앙은행마저 ‘하나의 기관’으로 만들지 않았다.

 

연방주의 국가에서 중앙집중 시스템은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연준 이사회는 강력한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곳이지만, 실제 지역 금융에 대한 영향력은 각 지역의 연방준비은행이 갖는다. 이은행들은 워낙 오래전에, 철도가 주요 교통망이던 시절 전국 물류와 금융 중심지들을 따라 배치되었다.

 

FOMC의 회의 구성도 독특하다.

 

연준 이사회 구성원 7명과 지역 연준은행 총재들 중 5명이 돌아가며 참여한다. 어떤 지역 총재가 그 해 회의에 들어오는지에 따라 시장 해석이 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마다 경제 환경이 다르니 총재들의 관점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연준의 시스템은 미국의 다양한 지역성과 산업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이처럼 기묘하게 복잡한 시스템은 처음부터 설계된 것이 아니다.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이 통과되면서 연준이 출범했지만, 초기에 연준 이사회와 지역 은행 사이의 권력 다툼은 치열했다.

 

누가 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누가 돈의 흐름을 지배해야 하는가를 두고 양측은 충돌했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고 나서야 구조 개혁이 본격 이루어졌다.

 

1933년과 1935년 개정된 은행법은 사실상 연준 이사회와 연준 의장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뉴욕 연준의 영향력이 컸던 초창기와 달리, 권력의 중심은 점차 워싱턴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야기가 ‘연준은 민간 자본, 특히 월가 금융자본의 소유물 아니냐’는 의혹이다. 연방준비은행 지분에 일부 민간 자본이 들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1930년대 개혁 이후 실질적 권한은 거의 연준 이사회가 가져갔다. 시스템의 일부에 민간이 참여하는 구조는 미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건국 이후 미국은 의도적으로 ‘공공’과 ‘민간’의 경계를 완전히 나누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 제도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중앙은행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국 초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마스 제퍼슨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전쟁 직후 미국은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 있었고, 각 주마다 전쟁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정부와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란은행을 모델로 한 중앙은행 설립은 국가 부채를 정리하고 달러의 신뢰를 세우기 위한 핵심 조치였다.

 

그러나 제퍼슨과 매디슨 등 반연방주의자들은 중앙은행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앙은행이 북부 상공업계만 풍요롭게 하고, 농민 다수를 희생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농업 중심의 주들이 강력한 중앙 권력에 대한 불신을 가졌다는 점은 미국 초기의 정치 지형을 결정지은 요소였다. 이 논쟁 끝에 해밀턴은 일부를 관철해 1791년 제1차 미국은행이 설립되었지만, 20년 후 재승인되지 않고 폐지되는 운명을 맞았다.

 

폐지된 중앙은행은 곧 재탄생했다.

 

1812년 전쟁을 다시 겪으며 미국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또다시 절감했다. 결국 1816년 제2차 미국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反)중앙은행 대통령’으로 불린 앤드류 잭슨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잭슨은 중앙은행을 거대 금융 엘리트들의 도구라고 확신했고, 결국 1830년대 말 재승인 법안을 거부해 중앙은행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중앙은행이 사라진 미국은 각 주 정부가 허가한 은행이 제멋대로 화폐를 발행하는 혼돈의 시대로 진입했다. 준비금 기준은 들쑥날쑥했고, 은행들의 신뢰도는 천차만별이었다. 남북전쟁을 겪으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1863년 내셔널 뱅크 법으로 다시 체계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이 진정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정적 계기는 1907년 공황이었다. 주가 폭락, 대규모 은행 파산, 최대 400만 명의 실업자. 금융 시스템을 떠받칠 안전장치가 없던 미국은 사실상 ‘JP 모건’이라는 한 개인의 비상구제에 의존해야 했다.

 

모건은 사재를 털어 망해가는 은행을 살려냈다. 정부는 자금이 모자라 모건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고, 모건은 테네시 석탄철강회사를 사실상 헐값에 사들였다. 이 사건은 ‘거대 금융자본 한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구조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는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때 등장한 정치인이 넬슨 알드리치 상원의원이다.

 

그는 JP 모건의 라이벌이자 동시에 경제 개혁론자였다. 알드리치가 주도한 조사와 논의 끝에 연방준비제도법이 1913년 통과되었고, 이듬해 연준이 출범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였고, 금융 자본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연준 설립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연준은 이렇게 탄생했다.

 

단순히 ‘금리를 조절하는 중앙은행’이 아니라, 미국의 건국 철학, 지역주의, 금융 공황, 그리고 거대 자본과의 갈등이 빚어낸 복잡한 타협의 산물이다.

 

오늘날에도 연준의 구조를 두고 음모론이나 과잉 해석이 끊이지 않지만,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미국이 어떤 국가를 설계하고자 했는지가 조금은 보인다. 중앙에 권력을 몰아주지 않으려는 경계심, 지역의 다양성을 반영하려는 구조, 금융 공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 그리고 민간 자본과의 미묘한 긴장까지.

 

 

단순함과는 거리가 먼 연준의 시스템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모순과 지향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 복잡성 속에는 한 나라가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제도를 끊임없이 모색해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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