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 만드는 데 많이 쓰이는 탄소섬유
탄소섬유 국산화가 말해주는 기술 독립의 속도
한국 산업사를 돌아보면, 위기는 대체로 기술 종속에서 시작됐고 돌파구 역시 기술 자립에서 나왔습니다.
최근 탄소섬유 국산화 논의는 단순히 한 소재의 개발 성공이 아니라,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 기술 종속의 장벽을 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됐습니다.
일본이 100년을 말했던 분야에서 한국이 5년 만에 성과를 냈다는 비교 역시 상징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 복잡한 구조가 존재합니다.
이번 슬로우레터는 바로 그 구조를 따라가며, 이 기술이 왜 중요한지, 왜 일본이 그렇게 확신했는지, 그리고 한국이 어떻게 그 시간을 단축했는지 차분히 살펴보려 합니다.
한국 산업이 일본과 얽힌 역사는 길고도 반복적입니다.
반도체 장비, 화학 소재, 정밀 부품 등 일본이 강한 분야에서는 언제나 한국이 후발주자였습니다. 탄소섬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항공·방산·우주·수소경제까지 올라가는 거의 모든 첨단 산업의 기초 소재였지만, 공급권은 사실상 일본 기업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은 100년이 지나도 못 따라온다”고 했던 말은 과장이라기보다, 자신들이 가진 압도적 우위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탄소섬유는 겉으론 가볍고 단단한 소재 하나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정교한 공정 제어와 오랜 누적의 기술이 겹쳐 있습니다.
불에 타지 않는 고분자 전구체를 일정하게 생산하고, 이를 고온에서 안정적으로 탄화시키며, 장시간 연속 공정 속에서도 분자 정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정밀도가 필요합니다.
일본 기업들은 이 전 과정을 장악해 왔습니다. 특허도 기술자도 장비도 모두 그들 손에 있었고, 시장은 절반 이상을 일본 도레이가 쥐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100년이라고 말한 데는 바로 이런 역사적 누적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소재 국산화라는 말은 늘 쉽고 결과는 늘 어려웠지만, 이 분야에서는 예외가 만들어졌습니다.
정부가 장기 기술 연구를 지원했고, 기업이 대규모 투자로 공정을 만들어냈으며, 연구기관이 핵심 공정 데이터와 노하우를 축적했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흐른 뒤, 일본이 100년이라던 기술은 실제 공장에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실험실 성공이 아니라, 항공기 부품과 수소탱크에 바로 적용되는 수준의 상용화였습니다.
이 성과가 의미하는 것은 자급이 가능해졌다는 사실보다 더 큽니다. 다른 나라의 규제와 공급 변수에 흔들리던 산업 구조에서 벗어났다는 점입니다.
전투기 개발이 지연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고, 수소경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핵심인 압력용기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우주 발사체의 경량화 역시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첨단산업은 어느 한 부품, 한 소재의 부족이 전체 프로젝트를 세우는 특성이 있지만 한국은 그 취약한 고리를 하나 끊어낸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반응입니다. 초기에 나온 반응은 의심이었습니다. 테스트와 국제 인증이 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한국이 그런 기술을 확보했을 리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증 데이터를 공개하고 상용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서 기존의 평가도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별다른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시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담담했습니다. 기술은 이미 확보했고, 평가를 의식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례는 한국이 일본을 넘어섰다는 상징으로 소비되기 쉽지만, 본질은 조금 다릅니다. 어느 나라를 이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종속을 벗어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이 100년을 말했던 이유는 그만큼 오랜 누적의 시간 때문이었지만, 한국이 5년 만에 돌파한 이유는 그만큼 기술 개발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지원, 기업의 선제적 투자, 연구기관의 데이터 축적이 동시에 맞물리는 순간 기술은 더 빨리 성숙합니다.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탄소섬유 국산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다른 핵심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도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도체 장비, 배터리 전구체, 우주 항공부품, 양자 기술 등 앞으로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입니다. 이번 사례는 한국이 그 경쟁에서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특정 분야에서는 주도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독점을 단숨에 넘어선 기술처럼, 한국은 앞으로도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발판을 넓혀갈 것입니다.
기술은 늘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시간이 국가마다 같지는 않습니다. 일본이 말했던 100년은 일본의 시간이었고, 한국이 보여준 5년은 한국의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의 흐름을 다시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속도가 앞으로의 산업 전략과 연결될 수 있는가일 것입니다. 탄소섬유 국산화는 이미 그 질문에 첫 번째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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