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9월 전력망 특별법 시행으로 직접 갈등을 중재하고 유사시 사업 추진을 강행할 수 있게 됐지만, 현장에서는 정부가 ‘몸을 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경우 에너지·산업 정책 전반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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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개 사업 중 절반 이상 지연 가능성
23일 한국전력(015760)공사에 따르면 올 2월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에 따라 추진 중인 54개 송·변전 건설사업 중 3분의 1에 이르는 18개 사업이 지연된 상태다.
강원·경북 지역 발전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500킬로볼트(㎸) 동해안-수도권 송·변전 사업은 8년째 지연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종점 격인 경기도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착공 지연으로 2027년 12월 준공 계획이 더 늦어질 상황이다.
345㎸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가 12년 지연 끝에 지난해 말 완공돼 전력 공급을 개시하는 등 2곳이 가까스로 준공됐지만 나머지 수도권과 충청, 전북 지역의 송전선로와 변전(환)소 건설 현장 곳곳이 사업 추진에 차질을 빚는 모습이다.
지연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준공된 2곳과 이미 지연 중인 18개 사업을 제외한 34개 사업 중 입지 선정과 용지매수, 설계와 시공 등 현 공정을 고려했을 때 최소 12곳에서 지연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54개 전력망 사업 중 절반이 넘는 30개 사업이 지연될 위기가 코앞인 셈이다.
일례로 신장성-신정읍, 신계룡-신정읍 등 충청·전북권 지역의 345㎸ 송전선로는 2029년 전후 완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입지선정 단계에서 후보지 주민의 반발로 진통을 겪고 있다.
대개 주민 수용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충청·호남·강원 지역의 풍부한 발전 전력을 전력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보내는 게 현 전력망의 큰 틀인데, 송전철탑이 지나는 곳마다 ‘내가 쓸 전기도 아닌데 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거기에 더해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지자체도 인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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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지방선거 앞두고 특별법도 힘 못써
정부가 지난 9월 시행한 전력망 특별법도 큰 힘을 쓰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정부가 국가기간 사업으로 지정된 곳에 대해선 갈등을 직접 중재하고 지자체 인허가를 일괄 승인한다는 내용을 법제화했으나 스스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정부는 지난 10월1일 99개 전력망 건설사업을 국가기간 사업으로 지정하며 인허가 ‘패스트트랙’에 올렸으나 대부분 실질적인 진척은 없다.
문제는 이 같은 전력망 차질이 곧 정부의 에너지 정책, 더 나아가 전력망을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AI)·첨단산업 정책의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달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계획(NDC)을 확정하면서 현재 36기가와트(GW) 수준인 재생에너지 발전 전력을 2030년까지 100GW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큰 틀에선 호남·충청권을 중심으로 조성 중인 해상풍력 등 대규모 재생에너지 발전 전력을 경기도 용인 일대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비롯한 수도권 수요처로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를 잇는 전력망이 없다면 수도권에선 전력이 부족하고 충청·호남의 발전 사업자들은 만든 전기를 팔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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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동해안-수도권 송전선로가 5년 넘게 지연된 탓에 강원 지역 민자 석탄발전소와 경북 원전, 강원 일대의 태양광·풍력발전 설비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수급 계획도 차질이 우려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강원 지역에선 석탄발전뿐 아니라 태양광·풍력 발전 전력도 물려서 오기 때문에 재생에너지 활성화 측면에서도 동해안-수도권 전력망 문제가 풀려야 한다”고 했다.
◇특별법 별개로 한전·정부 노력 뒷받침 돼야
정부는 주민 수용성 문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해저를 통해 초고압(HVDC) 송전선로를 잇는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계획에도 착수했지만, 이는 아무리 서둘러도 2030년 이후에나 완공돼 현 재생에너지 보급 계획에 맞추기 어렵다. 또 전체 전력망 완성을 위해선 해상전력망과 맞물려 내륙 송전선로 건설 계획도 기한 내 마무리돼야 한다.
결국 전문가들은 전력망 특별법 시행과 별개로 한전은 지역 주민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고,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갈등 중재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제언이 뒤따른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벤치마킹한 독일의 경우 지중화(지하 매설) 우선 원칙을 도입하는 한편 토지보상과 생활지원금 등을 확대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이 최종 설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반대를 줄여나갔다. 일본은 공원이나 도서관, 체육시설 등과 변전소를 결합해 지역 랜드마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지자체의 인허가를 얻어낸 사례가 있다.
유 교수는 “한전이 한전아트센터를 지어준 서울 양재변전소처럼 다른 갈등 지역에서도 이 같은 혜택을 요구하는 상황”이라며 “모든 곳에서 같은 수준의 혜택을 제공할 순 없겠지만 맞춤형 대책을 통해 주민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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