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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핵의 평화적 이용권리(핵 주권)를 확보해 나가기로 한 것은 한반도 전략지형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전환점이다. 평화-비핵 교환협상이 교착되고 북한 핵 무력이 질적·양적으로 고도화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억제력의 실행력을 높이는 것과 함께 우리의 핵 잠재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의 대규모 대미투자의 대가로 핵의 평화적 이용권리를 확보하는 길을 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비핵화가 어려워진 조건에서 힘의 균형정책을 본격화할 경우 한반도를 둘러싼 역내 국가들 사이의 군비경쟁이 치열해지고 갈등이 격화할 것이다.
북한이 6·12 북·미공동성명 이행에 협력하기로 한 데 대해 발끈했지만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유해송환(인도적 문제 해결) 등 4개 합의는 북한이 제안한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출발하는 내용을 다룬 2018년 6월 11일 자 노동신문은 ‘조미수뇌회담에서는 달라진 시대적 요구에 맞게 새로운 조미관계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문제, 조선반도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문제들을 비롯해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의견이 교환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놀랍게도 이 내용 그대로 북미공동성명에 들어갔다.
북한의 의도는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새로운 북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교환하는 평화-비핵 교환협상(북한의 요구사항인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과 미국의 우려 사항인 비핵화를 안보-안보 교환협상)을 ‘단계별·동시행동원칙’에 따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한미가 북미공동성명 이행을 강조한 것은 싱가포르 합의로 돌아가서 북한 비핵화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미국이 비핵화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하면서 핵무력 고도화에 집중했다.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문화한 북한은 한미가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대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란 표현을 쓴 데 대해 헌법 부정, 국가 실체와 실존 부정이라며 반발했다. 북한이 2017년 11월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2018년 경제·핵 병진노선을 경제건설총력집중노선으로 전환하고 평화-비핵 교환 협상을 시도했지만 제재 해제에 집중하다가 협상이 결렬됐다.
하노이 노딜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변곡점이었다. 북한이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했고, 미국에는 더 이상 비핵화 협상은 없다고 버티며 핵보유를 인정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군사분계선(MDL)을 국경선으로 만드는 물리적 조치를 취하는 배경에는 더 이상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없이 사회주의 독립 국가로서 미국·일본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이 핵보유를 고수하고 있어 평화-비핵 교환협상 틀은 더 이상 가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마이클 폼페이오 전 장관은 지난 11월 17일 법무법인 대륙아주가 미국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에서 주최한 간담회에서 김정은을 ‘불쾌한 인물’이자 ‘사악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북핵 협상의 실패 책임을 중국으로 떠넘겼다. 하노이 노딜의 책임을 전적으로 김정은과 중국에 돌리는 것은 협상의 실무책임자로서 바람직한 자세로 보기 어렵다. 한·미가 북한 의도를 ‘오독’한 책임도 크다. 새로운 북미협상을 위해서는 하노이 노딜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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