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도덕경' 번역은 발자취일 뿐…각자 자신만의 길 만들어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걸을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도경' 맨 앞에 나오는 이 유명한 문장은 '도덕경'을 시작하는 문장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도경'이 앞에 배치된 판본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와 1990년대 잇달아 기존 것보다 더 오래된 판본이 발견되는데, 모두 '덕경'이 '도경'보다 앞에 배치돼 있었다. 발견되지 않은 노자의 원본도 '덕경'이 앞에 배치돼 있었다는 추측이 학계의 정설이 됐다.
소설가 켄 리우(49)는 이 모든 과정을 알고도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서 '길을 찾는 책 도덕경'(윌북)에서 의도적으로 '도경'을 '덕경'보다 앞에 배치했다.
켄 리우는 "작가로서 나는 텍스트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권위를 추적하거나 강제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발표한 소설은 출간 과정에서 여러 수정이 이뤄지고, 작가가 수정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인쇄에 반영되지 못하기도 한다. 작가가 가장 선호하는 판본이 번역본, 축약본, 발췌본, 해적판 등에 밀려 독자들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작가는 "더 유익한 접근은, 노자가 언어에 대한 집착, 즉 살아있는 지혜 자체가 아닌 단지 그림자나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대체로 경멸했음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짚었다.
"어느 장이 자리하는 곳이 시작인지 끝인지 중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도 자체에는 시작도 끝도 중간도 없으니까."(본문에서)
'길을 찾는 책 도덕경'은 작가가 '도덕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해석을 덧붙인 책이다.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는 "공기 중에서 노자를 들이마시며 자랐다"고 말할 정도로 '도덕경'에 친숙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이야기 소재가 모두 고갈된 듯한 막막한 기분이 들었을 때 이 오래된 경전을 다시 펼쳤다가 느낀 바를 책으로 펴냈다.
'도경'과 '덕경'의 순서를 둘러싼 이야기를 '도덕경' 속 노자의 지혜와 연결지은 데서 엿볼 수 있듯, 작가는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을 쉬운 예시로 풀어냈다. 스토리텔링에 능한 소설가의 장점을 십분 살렸다.
작가는 이미 수많은 학자가 연구하고 번역해온 '도덕경'을 자신이 재차 번역한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도덕경' 속 노자의 철학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도덕경'을 번역하기가 매우 난해하다고 언급하며 "'도덕경'이 번역에 저항하는 까닭은, 그 의미가 붙잡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장난스럽고 구속받지 않아서인데, 이는 곧 지고의 자유인 소요(逍遙)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도덕경'의) 모든 번역은 우리가 공유하는 큰 '길' 위에 번역가가 남긴 하나의 발자취일 뿐이며, 모든 독자는 그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도에 이르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야만 한다"고 했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켄 리우는 엔지니어, 변호사 등으로 일하다가 2002년 소설가로 데뷔했다. 2011년 발표한 첫 단편집 '종이 동물원'으로 권위 있는 SF(과학소설) 문학상인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석권했다.
황유원 옮김. 204쪽.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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