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채반의 고사떡처럼
찬장 안의 고들빼기김치처럼
가을이 발효되고 있다.
오래전 꽂힌 서가 위의 시집이
수년째 부동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한 번 마주한 행간은 까마득하다.
고향집에서 이사 온 빛바랜 책들
인간의 조건, 명상록,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캥거루처럼 저만의 내용을 품고 있다.
늦가을 오후, 잘 익은 빛이 은행잎에 내린다.
스스로 탐구한 작용으로
노랗게 표면을 물들인 채
낙상한 열매는 짓밟혀 고리고, 낙엽은
사색하는 효모 같다.
2억 년을 이어온
퇴색한 인문학의 수령처럼
한 번도 매지 않은 장롱 속 넥타이처럼
다람쥐는 도토리를 갉고 있다.
그 자리에서 세월을 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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