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유신 정권 말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영주(68) 씨가 46년의 긴 세월을 지나 사법부로부터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지난 2025년 11월 13일,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이 씨의 재심 상고심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허위 자백에 기댔던 과거 국가폭력의 산물이 사법의 이름으로 바로잡힌 순간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46년간의 족쇄
이 씨의 시련은 1979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찰에 체포된 이 씨는 '공포의 상징'으로 불리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수사기관은 이 씨가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 씨는 수사기관이 원하는 대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80년, 이 씨는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임을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유죄 판결은 46년간 이 씨를 '공안사범'이라는 굴레에 가두었다. 이 씨는 2024년 1월, 과거의 유죄 판결이 고문과 불법 구금에 의한 허위 자백에 근거한 것이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증거능력 없다"…재판부의 사과와 무죄 판결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이승한·박정운·유제민)는 2025년 7월,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씨와 관련 공동 피고인들의 진술이 영장 없는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 속에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확히 판시했다. 특히 당시 재판부는 선고 직후 자리에서 일어나 이 씨에게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며 허리를 숙여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뒤늦게나마 사죄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된다"며 재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이 씨의 남편인 고남석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은 당시 검찰의 상고를 "상처 입은 아내에게 가한 2차 가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 '남민전'
남민전 사건은 1979년 10월 9일, 당시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유신 말기 최대 규모의 공안사건이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을 중심으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목표로 결성된 지하조직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안당국은 이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베트콩(Viet Cong)과 같은 게릴라전을 통해 북한과 연계하여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낸 이재오, 시인 김남주, 진보언론인 홍세화 등 80여 명이 대거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씨의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46년이 걸린 것은 이 사건이 당시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나 가혹하고 조직적으로 조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지연된 정의'와 남은 과제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이영주 씨의 무죄를 확정함에 따라, 46년간 덧씌워졌던 굴레는 비로소 벗겨졌다. 이번 판결은 인혁당 사건, 이수근 간첩 조작 사건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수많은 공안사건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는 '지연된 정의'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비록 사법적 명예는 회복되었으나,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한 개인과 그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기 어렵다.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과거사 청산과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폴리뉴스 김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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