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인물 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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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인물 사카모토 료마

뉴스컬처 2025-11-18 12:44:32 신고

[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일본 근대화의 아이콘인 사카모토 료마
일본 근대화의 아이콘인 사카모토 료마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의 선구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사실 검술과는 별반 관련 없는 퇴역 사무라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개혁사상가이자 정치가에 가깝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그를 라스트 사무라이로 생각한다. 심지어 지난 50년간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를 할때마다 단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료마는 소설·영화·TV드라마·애니메이션 등으로 수없이 확대 재생산된 인물이다. 일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료마’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료마는 1836년 11월 15일(음력) 오늘날의 고치 현인 ‘도사번’ 에서 하급 무사계급인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와 어머니 사카모토 코우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카모토 집안은 오랜 기간 상업에 종사해 상당한 재력을 일궈 어린 료마는 유복하게 성장했다.

료마가 외부 세계에 눈을 뜨고 일본의 개혁에 대해 크게 인식하게 된 계기는 자신이 성장한 도사번을 떠난 후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다. 일본 해안에 출현한 구로후네(黑船, 서양의 흑선함대)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문명이 몰려오고 있음을 자각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무라이로서 검술을 익히며 살았다. 당시 자신이 속한 번을 떠나는 것은 극형에 처해지는 불법이었다. 모든 무사들은 막부나 영주의 허락없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규칙과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출생한 도사번을 벗어나 개화파이자 군함부교나미(軍艦奉行竝)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고 그의 새로운 문명에 관한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듯 료마는 전통 일본 사무라이적 인식과 근대적 사고가 공존했던 인물이다.

료마는 늘 새로운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의 무사 계급들은 장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느날 료마의 고향 친구가 오랜만에 그를 만나니 단도를 차고 있었다. 왜 단도를 차고 있느냐고 물으니 “실전에서는 짧은 칼이 휘두르기 편하지”라 하기에 옛 친구도 공감이 가는 터라 납득을 하고 짧은 칼을 차고 다녔다. 다음에 만났을 때 친구가 단도를 자랑하자 이번에는 권총을 내밀며 “총 앞에서는 칼 같은 건 무용지물이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권총을 사서 폼을 잡고 다녔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친구는 멋진 권총을 내보이며 자랑하자 료마는 만국공법(국제법) 책을 내밀며 “지금부터는 세계를 모르면 안되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 도 한발 앞서가는 료마에 미칠 수 없음을 안 친구는 여기에서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료마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1865년이었다. 당시 일본의 실권을 쥔 대표적인 지역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개혁의 노선 투쟁과 함께, 누적돼 온 양 지역의 해묵은 갈등으로 인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료마는 일본인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수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사진은 료마전에서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를 연기한 일본의 국민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
료마는 일본인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수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사진은 료마전에서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를 연기한 일본의 국민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

료마는 사쓰마번의 나카오카 신타로와 조슈번의 리더격인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회동을 주선하고, 조슈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료마는 자신의 회사를 통해 조슈번의 무기 구매를 주선한다. 이로 인해 조슈번은 같은 해 8월 중순 영국의 상인에게서 총기 7300정을 매입할 수 있었다.

심한 갈등 관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료마의 물밑작업으로 상호간 협력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만들었다.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 끝에 사쓰마와 조슈는 동맹을 체결하게 되니 이를 ‘삿쵸 동맹’이라고 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대정봉환(大政奉還)’ 에 관한 구상을 내놓았고 도사번의 공식 입장으로 만들었다. 대정봉환이란 일본 에도 막부(바쿠후)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일왕에게 막부의 통치권을 반환하고 이를 일왕이 받아들인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일왕을 중심으로 정치체계를 재편한 것이어서 일왕의 지지를 받으며 메이지 유신을 추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셈이다.

이렇게 메이지 유신의 큰 족적을 남긴 풍운아 료마는 1867년 12월 10일 메이지 일왕이 ‘왕정복고(1868)’를 선포하기 1년 전, 교토의 한 여관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사망한다. 당시 31세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풍운아 정객에 대해 수많은 일본인들은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이라며 열광한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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