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한민광 작가] 2025년 11월 1일. 이집트 기자 고원(Giza Plateau)의 끝자락, 수평선 위로 우뚝 솟은 피라미드가 삼각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 또 하나의 거대한 삼각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집트 대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 GEM)’이다.
이 건물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이 박물관은 번화한 카이로 도심이 아닌, 피라미드 바로 앞에 세워졌을까?”
이 질문 자체가 GEM이 가진 의미를 설명해 준다. 이 박물관은 단순히 귀중한 유물을 모아두는 창고가 아니다. “이집트 문명 전체와 현대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로 기획된 것이다.
1. 도시의 박물관에서 ‘문명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관문
드넓은 항공 사진에서 보듯, GEM은 도시와 사막 사이를 이어주는 거대한 입구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 위치는 단순히 피라미드가 잘 보이는 ‘명당’을 넘어선다. 설계팀과 이집트 정부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 공간은 나일강을 감싸는 도시와 사막 고원(고대 세계)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도시와 고원 사이의 문턱(Threshold)”이자 역사적 과거로 향하는 ‘관문(Gateway)’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GEM의 공식 설계 목표에 담긴 핵심 비전이다. (출처: Heneghan Peng Architects 공식 발표)
기존 카이로 박물관(타흐리르 광장)이 도심 속에서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었다면, GEM은 그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건물 자체가 문명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첫걸음을 안내하며 “기억을 담는 가장 크고 새로운 집”으로 기획되었다.
건물이 피라미드 군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비스듬히 틀어져 설계’된 것은 이 구조적 의도를 극대화했다. 박물관 입구를 피라미드 방향으로 활짝 열어 두어, 방문객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 역시 지금 수천 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길 위에 서 있다’는 압도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최근 GEM 입구는 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사람들은 차량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기자 고원’과 ‘고대 이집트’라는 장엄한 역사적 배경 속에 들어선다. 도시의 소음과 복잡함은 잠시 뒤로 밀리고, 사막과 거대 건축이 주는 웅장함이 방문객을 먼저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GEM이 피라미드 옆에 자리함으로써 얻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다.
2. 피라미드를 닮은 현대 건축, 사막의 빛을 담다
멀리서 보면 GEM 건물 전체는 거대한 삼각형 면들이 정교하게 겹쳐진 형태다. 이는 단순한 건축 디자인을 넘어 피라미드의 형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추상화한 결과물이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삼각형 유리 구조물들은 고대 피라미드의 형태를 아래로 뒤집어서 만들어, 마치 고대의 신성한 힘을 박물관 내부 공간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마법적인 장치처럼 보인다. 건물 외벽에 반복되는 수천 개의 작은 삼각 패널은 사막의 모래 언덕이나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물결무늬를 상징하며, 사막 환경과의 유기적인 연결을 시도한 듯하다. 또한 이 여러 패널은 햇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색이 미묘하게 변한다. 아침에는 밝은 은색이었다가 해가 지면 황금빛 모래 색깔로 바뀐다. 마치 건물이 스스로 사막의 시간과 빛에 순응하고 반응하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오벨리스크 광장 또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 거대한 돌기둥(오벨리스크)이 현대적인 사각형 틀 안에 엄숙하게 놓여 있다. 이는 ‘오래된 역사의 상징이 현대적인 구조와 만나 새롭게 재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GEM 전체가 고대의 유물을 단순히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3. 문명의 중심에 선 람세스 2세와 황홀한 천장
GEM의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은 “단일 문명(고대 이집트)을 위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전시 공간은 약 49만 제곱미터에 달하며, 고대 이집트 유물 컬렉션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대 규모다.
언어 기둥에는 ‘이집트’라는 단어가 여러 나라 언어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단순한 국제적 배려를 넘어, “이집트 문명은 전 인류가 함께 기억하고 공유해야 할 공동의 유산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다.
가장 상징적인 전시물은 웅장한 람세스 2세 대형 석상이다. 이 석상은 GEM이 지어지기 전, 카이로 람세스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이집트의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던 유물이었다. 그를 박물관의 가장 중심인 그랜드 홀에 다시 세운 것은 단순한 유물 ‘전시’를 넘어 “수천 년 이집트 문명 전체가 이제 새로운 영구적인 보금자리로 옮겨왔다”는 국가적 선언과도 같다.
로비의 높은 천장은 복잡한 금속 구조물로 덮여 있는데, 이는 사막의 강렬한 햇살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부드럽고 흩어지는 조각난 빛으로 바뀌도록 설계되었다. 마치 피라미드 내부의 좁은 틈이나 나일강변에 비치던 고대의 빛과 그림자를 현대 건축 언어로 재현해낸 듯한 신비로운 효과를 연출한다.
4. 고난의 현대사를 넘어선 ‘미래의 아이콘’
GEM의 개관은 2012년부터 여러 차례 연기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박물관 건설은 단순한 공사 기간 지연이 아니었다. 2011년 혁명, 지속적인 경제난, 행정적 혼란, COVID-19 팬데믹 등 이집트 현대사의 굵직한 모든 굴곡을 겪으며 완성된, 생존과 부흥의 상징과 같은 거대 프로젝트였다. 특히 10만 점이 넘는 유물을 기존 박물관에서 GEM으로 옮기고 보존 처리하는 작업은 “세계 박물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유물 이동 프로젝트”로 기록되었다. 유물 하나를 옮길 때마다 국제 전문가팀, 이집트 정부, 기술팀 간의 복잡한 합의 과정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일정이 자주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출처: CNN-GEM 관련 보도)
그러나 길었던 고난과 지연 끝에 GEM은 완성되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현대 이집트의 최신 기술력, 굳건한 정치적 의지, 그리고 미래 관광 전략과 강력하게 연결하는 새로운 국가적 아이콘이 되었다.
5. 사막과 현대, 그 경계에 선 ‘New Platform’
GEM은 늘 두 개의 세계를 포옹한다. 뒤쪽으로는 영원한 사막과 피라미드, 앞쪽으로는 카이로의 무한한 도시. 건축가들은 GEM의 역할을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문지기(Guardian)이자 문화의 문(Gateway)”으로 명확히 규정했다.(출처: The Energy Pioneer 등)
건물의 거대한 지붕은 사막의 하늘을 받아들이고, 넓은 광장은 현대 도시의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입구의 삼각형 구조는 방문객을 피라미드의 방향으로 이끌고, 내부의 람세스 석상은 문명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됨을 알린다.
GEM은 단순히 유물을 보존하는 창고를 넘어선다. 피라미드 옆에 새로 세워진 또 하나의 현대적인 피라미드이며, 낡은 유물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문명을 ‘기억’하고, ‘해석’하며, ‘미래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대의 플랫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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