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타결한 한·미 관세협상 최종안이 17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 보고되면서 산업계의 이해득실 계산이 본격화되고 있다. 협상 결과만 놓고 보면 자동차·의약품·반도체 등 주력 수출품의 관세 부담은 급한 불을 껐다. 반면 한국 기업이 2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투자와 1500억 달러 조선협력투자 참여를 전제로 한 초대형 패키지가 함께 제시되면서, 관세 안정성과 대규모 해외투자가 동시에 펼쳐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관세 조정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성과라는 평가다. 지난 8월부터 미국은 기존 최혜국(MFN) 또는 한·미 FTA 관세에 15%의 상호관세를 추가로 부과해 왔다. 14일 MOU 서명 이후에는 미국 MFN 관세가 15% 미만인 품목만 ‘총 15%’의 상한을 적용받게 된다. MFN 관세가 15%를 넘는 경우에도 FTA를 적용해 합산 관세를 15%로 묶는 방식이다. EU·일본과 동일한 조건을 확보한 셈이다.
자동차와 부품에 부과되던 25% 수준의 232조 관세도 15%로 조정되고, 시행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발의된 달의 다음 달 1일부터 소급 적용된다. 의약품은 최대 15% 범위에서 차등 적용하며, 반도체는 ‘주요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품목 관세로 정리됐다. 목재·항공기 부품·철강·알루미늄·구리 등은 무관세 또는 상한선 조정 방식이 확정됐고, 제네릭 원료·일부 천연자원 등 전략 품목은 향후 FTA 공동위에서 상호관세 면제 여부를 세부 협의하게 된다.
비관세 분야도 변화가 적지 않다. 미국 FMVSS 기준 충족 시 국내 자동차 안전기준을 인정하고, 휘발유 배출가스 인증 또한 미국 제출 자료를 수용하기로 했다. 농업·생명공학 제품은 과학적 위해성 심사 절차를 명문화하고, 미측 원예작물 검역 요청을 전달하는 ‘U.S. Desk’도 운영된다. 일반명칭(체다·살라미 등) 사용은 한·EU FTA 수준을 유지하고, 디지털 분야에서는 국경 간 데이터 이동과 비차별 원칙을 담았다.
문제는 이러한 관세·비관세 패키지와 동시에 추진되는 ‘한·미 전략적 투자 MOU’다. 미국 측은 애초 3500억 달러를 요구했으나 이번 협상에서 2000억 달러로 조정됐다. 여기에 조선·에너지 프로젝트 중심의 1500억 달러 조선협력투자가 별도로 이어진다. 산업부는 이행력을 확보하기 위해 11월 중 관련 특별법 제정을 추진할 예정이며, 제도화될 경우 실제 부담과 역할은 정부와 기업이 함께 나누는 구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투자 구조는 복잡하다. 양국은 산업부·미 상무부 장관이 공동 위원장을 맡는 ‘투자위원회’를 신설하고, 여기서 상업적으로 타당한 프로젝트만 대통령에게 추천한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종료일(2029년 1월 19일)까지 선정 작업이 진행돼 향후 4년간 대형 프로젝트가 순차적으로 결정될 전망이다. 조선·에너지·반도체·의약품·핵심광물·AI·양자컴퓨팅 등 미국이 전략산업으로 분류한 대부분이 대상이다.
자금 집행은 연간 200억 달러 한도의 ‘캐피털 콜(capital call)’ 방식이다. 투자위원회가 사업 진척도(milestone)에 따라 달러 납입을 요청하면 최소 45영업일 이후 실제 투자가 이뤄진다. 자금 대응이 늦어질 경우 미지급 이자 몫 조정이나 관세 재조정(스냅백) 가능성이 언급돼 있어, 실질적인 이행 리스크 관리가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조달 구조는 ‘투자 SPV’와 ‘프로젝트 SPV’의 이중 체계다. 위험 분산을 위해 리스크 풀링(risk pooling)을 적용해 특정 프로젝트 부진이 전체의 손실로 직결되지 않도록 설계했다. 금리는 미 국채 20년물 고정금리에 스프레드가 더해지는 방식이며, 미·일 MOU의 가산금리보다 30bp 낮게 설정된 점이 특징이다. 자유현금흐름 배분은 원리금 상환 전에는 5:5, 상환 후에는 1:9 구조로 설계돼 장기적으로는 수익 배분의 방향성이 미국 중심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조선협력투자 1500억 달러는 별개로 운영된다. 승인이 난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가 FDI·대출보증·선박금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하며, 사업 수익은 원칙적으로 참여 기업에 귀속된다. 다만 실제 이익 규모는 미국 해군 프로젝트 입찰 구조, 로컬 콘텐츠 요건, 지분 참여 방식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정부도 보고서에서 “국익을 우선에 두고 최선을 다한 결과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루어진 협상으로 일정 한계도 존재 ”한다다고 평가했다. 상호관세 15% 유지 속에서 자동차·의약품의 관세 상한을 확보한 점과 초기 요구 규모(3500억 달러)를 2000억 달러로 조정한 점, 연간 납입 한도(200억 달러) 설정으로 환율 부담을 줄인 점은 성과로 꼽힌다. 동시에 “상업적 타당성 검증, 분쟁 최소화, 원금 회수 대책 마련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재계는 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관세 안정성은 단기적으로 호재지만, 투자 구조는 미국 전략산업에 대한 장기 참여를 의미해 향후 20년간 국내 자본시장과 환율, 기업 재무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프로젝트 선정과 수행 과정에서 미국 측 영향력이 상당한 만큼, 한국 기업의 전략적 판단과 리스크 관리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반면 기회를 보는 시각도 분명하다. MASGA(한·미 조선협력)를 통한 미국 해군·연안경비대·LNG·해상풍력 프로젝트 참여가 현실화되면 국내 조선사의 수주 변동성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항공기 엔진 도입, 중소기업 전시회 참여 확대 등도 양국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관세 완화의 효과와 대규모 투자의 부담이 동시에 놓인 만큼, 향후 국회 입법 과정·투자위원회 구성·초기 프로젝트 설계가 한국 기업의 20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신중론이 힘을 얻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관세 불확실성은 줄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틀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시대가 열린 것 같다”고 전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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