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태어난 손주는 다음 해 3월 어린이집에 입학했다. 채 걷지도 못할 때였다. 적응 기간 한 달 동안 첫 주는 1시간, 둘째 주는 2시간, 이런 식으로 집 떠난 생활에 적응해 갔다.
보내고 돌아와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데리러 가는 지경이었지만 들여보내고 오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 셋이 같은 반이었다. 등원 시간이면 어린이집 정문이 ‘통곡의 문’이 된다는데, 손주는 울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적응을 잘했다.
살아가는 데 신조가 많은 편인데, 무슨 일이든 ‘처음 일주일이 힘들다’는 것도 나의 신조다. 게다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응 못 할 일은 세상에 없다. 수많은 적응의 연결이 삶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사람은 살기가 좀 수월하다.
어린이집에 적응하고 1년쯤 되어 가는 겨울, 코로나라는 생소한 단어가 들려왔다.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치부하기엔 살벌했다. 당연하고 평범했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격리, 휴교, 휴업, 거리 두기, 여행 금지···.
그러면서 마스크가 등장했다. 어른들은 불편은 해도 얼굴을 가려줘서 좋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셔츠 깃도 못 견뎌 하는 아이들에게 입과 코를 막는 마스크라니···. 선생님들의 교육 효과 덕인지, 안 쓰겠다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마스크를 쓰고 등원하는 손주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코로나 시국이야 모두 힘들었고, 오가는 사람이 없는 텅 빈 거리와 가게들은 먹고살아야 하는 생과 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어린아이를 키우던 부모들의 절박함은 남달랐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화상으로 수업을 듣다 보니 단체 생활의 규칙부터 교우 관계 등 꼭 배워야 할 것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게다가 급식이 없으니 삼시 세끼 집밥을 챙겨 먹여야 했던 엄마들의 고충도 컸을 것이다. 말을 배우는 시기에 마스크를 끼고 수업하다 보니 선생님의 입 모양을 볼 수 없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손주도 마스크를 쓰고 체육 수업을 하고 온 날이면 땀인지, 콧물인지, 침인지 모를 것에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확진자라도 생기면 휴원, 종일 말하고 웃고 뛰놀아야 할 손주와 함께 집에 갇히고 만다.
‘갇혔다’라는 표현이 딱이다.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마스크를 쓰고 외출이라도 해볼까 하다가도 혹시 확진자가 다녀간 곳은 아닐까 불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코로나 시국 한가운데에 있었을 때,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모두를 가장 힘들게 했을 것이다. 기한을 알고 기다리는 건 그래도 할 만하다.
지나고 보니 과잉 대응이었다, 아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대응이었다, 말이 많지만 그 또한 모두 지나갔고, 손주와 할미는 다행히 코로나를 비켜 살아남았다. 혹시 몰라 남겨 둔 알록달록 어린이용 마스크 끈과 함께···.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leesoomi7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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