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힙합 듀오 '듀스(DEUX)' 출신 가수 김성재(1972~1995)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흘렀다. 오는 20일이면 고인의 30주기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1995년 11월19일 SBS TV '생방송 TV가요 20'에서 '말하자면'의 첫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 이미지로, 그는 '불멸의 아이콘'이 됐다. 이 무대 다음날 세상을 떠났고 '청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성재·이현도(53)가 함께 결성한 힙합듀오 '듀스'는 한국 힙합의 첫 장면 중 하나로 통한다. 올해가 데뷔 32주년이다. 가수 현진영의 댄스 팀 '와와(WAWA)' 2기 출신인 이들은 흑인 음악 기반을 국내에 소개하며 짧은 활동 기간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춤, 패션, 태도에서 그들은 메이저이자 언더그라운드였고 힙스터이자 젊은 마스터"(임희윤 음악평론가)였다.
1993년 4월 1집 '듀스(Deux)'로 데뷔 이후 2년 만인 1995년 7월 해체됐다. 하지만 '나를 돌아봐' '굴레를 벗어나' '우리는' '여름 안에서' 등의 히트곡을 내며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ARMY)' 등 현재 수많은 아이돌 팬덤 이전에 '듀시스트'(DEUXIST·듀스 팬들)가 있었다. 한국 대중음악계 선구자인 이 팀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요계에 100% 랩곡이 등장한 것도 듀스의 앨범을 통해서다. 이들의 2집 '듀시즘' 수록곡 '무제'는 국내 최초의 100% 랩이다. '나를 돌아봐'는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K-팝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삽입돼 K-팝 원류임이 공인됐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이현도가 팀에서 내적인 음악의 완성도를 맡았다면, 패셔니스타인 김성재는 외적인 근사함을 담당했다. 즉 듀스의 음악적 멋은 이현도, 스타일적 멋은 김성재였다. "지금보다 좀 더 정형화된 사회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찾는 '느낌 좋은' 예술가였다. 심지어 그의 감각은 여전히 유효하다"(박준우 한대음 사무국장) 같은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외국인 학교에도 다녔던 김성재는 트렌드에 민감한 감성,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숱한 청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그는 다양한 예술 활동을 꿈 꿨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멸의 아이콘이 돼 가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부활했다. 지난 2009년 한 청바지 브랜드는 컴퓨터그래픽 작업 등을 통해 김성재의 생전 사진과 뮤직비디오를 별도로 촬영한 화보와 합성하는 방식을 사용해 그를 CF에 등장시켰다. 몇 년 전에 아바타로 부활하기도 했다. 아이돌 후배들은 여전히 그를 롤모델로 삼는다.
고인의 사망 원인을 두고 여러 의혹이 제기됐으나,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고인 오른팔 등에서 28개 주삿바늘 자국이 발견됐고, 시신에서는 동물 마취제인 졸레틸이 검출됐다. 용의자로 떠오른 건 김성재 전 여자친구 A씨였으나 대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성재 그리고 듀스는 그럼에도 우리 곁에 계속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의 유산은 지금도 한국 힙합과 케이팝, 스트리트 패션까지 문화 전반에 이어지고"(최용환 프리랜서 에디터) 있기 때문이다.
이현도는 현재 듀스의 정규 4집을 준비 중이다. 듀스 30주년이던 지난 2023년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다. 이현도는 그 해 '뉴엑스 뮤직 페스티벌(NEW X)' 출연을 앞두고 해당 축제 측과 인터뷰에서 관련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김성재의 30주기인 올해를 넘기지 않고 선공개곡 등으로 4집 발매의 불을 지핀다는 계획이다. 김성재의 목소리를 기존 음반 등에서 인공지능(AI)으로 추출할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가 지난 2023년 27년 만에 발매한 신곡 '나우 앤드 덴(Now And Then)'엔 AI 기술로 살려낸 고(故) 존 레넌의 30대 목소리가 담겼었다.
김성재가 떠난 뒤 '나는 절뚝이며 살아간다'고 털어놨던 이현도는 지난 9월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듀스로 다시 활동을 하고자 한 이유 중 하나로 고인의 멋있는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던 점을 꼽았다. "더 이상 '내가 외면하고 등 돌리지 말자'"고 생각한 것이다. 11월만 되면, 모든 매체가 김성재 사망을 비극으로만 자꾸 얘기하는데 이현도는 김성재의 제일 빛나고 멋졌던 순간을 자신이 더 알리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이현도는 "듀스 출범부터 '야 너 없으면 나 안 돼. 너가 있어야 돼'"라고 설득해 김성재를 끌어들였다며, 반쪽을 이렇게 기억했다. "신장도 좋고 또 옷도 소신 있게 잘 입었죠. 지금도 음악업계 분들은 물론 디자이너, 패션 에디터 분들을 만나면 성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도움으로 이번 4집 성재에 대한 패션도 고민하고 있어요. 성재가 남겨놓은 유산에서 영감을 받아서 구현하는 후배들도 여전히 있으니까요."
로마시대 철학자 겸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은 자의 삶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있다." 다음은 7명의 음악 전문가가 개인적으로 풀어낸 김성재에 대한 기억, 추억 혹은 헌정.
◆김윤미 뮤직저널리스트(한국대중음악상(한대음) 선정위원)
"안방1열에서 직관한 그날 밤의 기억은 30년이 지나도 가혹하다. 관심이 집중된 솔로 데뷔 첫 방송 후의 감탄사가, 마지막 방송의 믿기 힘든 비탄사로 바뀌는 데는 하룻밤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요'가 대중문화, 어쩌면 문화 전체를 선도하며 이끌었던 '가요의 최전성기' 1990년대엔, 소위 '연예미디어'가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여서 판매부수를 좌우하는 '인기'가수들은 매월, 심하게는 매주, (그 모든 매체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취재와 인터뷰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가요계의 중심에 서 있던 1972년생 동갑, 서태지와 듀스(김성재/이현도)의 취재를 동시에 담당하던 기자는 많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듀스, 김성재를 취재원으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당시엔 낯선 '힙합' '뉴 잭 스윙'을 대중적 언어로 만든 듀스를 당연히 관심있게 지켜봤고 '듀스 그 후'의 첫 결과물, 김성재의 솔로앨범에도 매우 주목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않고 세련됐다' '1990년대 GD' 등의 표현은 (가벼울 순 있으나) 과장된 상찬은 아니다. 멜로디와 비트는 즉각적으로 귀에 꽂혔고, 스타일링에 세월의 흔적 따위는 없었으며, 흐느적대는 안무에서조차 '간지라는 것이 폭발'했다. 그리고 꼭 30년이 흘렀다. '말하자면' 여전히 말문이 막히는 이야기다."
◆박준우 한대음 사무국장
"90년대를 거쳐온 누구에게나 김성재라는 사람은 '뭔가 다른 존재'였다. 당시에는 뚜렷한 언어로 풀어내기 어려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존재 자체가 곧 감각의 등장이자 승리였다. 지금보다 좀 더 정형화된 사회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찾는 '느낌 좋은' 예술가였다. 심지어 그의 감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대화 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한때 라디오에서 가요 믹스 방송을 했을 때 '말하자면'을 자주 틀었다. 빈틈 없는 믹싱을 위해 초 단위로 분석해 들으며 얼마나 훌륭한 곡인지 감탄하곤 했다. 특히 리듬감과 질감 모두 탁월했던 비트 메이킹과 브레이크 파트는 꼭 팝 음악을 듣는 듯했다. 음악이 훌륭한 걸 넘어서 한 세대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흑인 음악 좋아했던 친구들이 교실 뒤편 넓은 공간에서 듀스 춤을 연습하다 좌절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학교에서 제일 멋진 친구들이 수련회 밤에 듀스 춤을 췄던 기억도 난다. 명곡들로 음악계 판도를 바꾼 선구자이자 어린 학생들의 롤 모델이었던 멋진 형이었다."
◆임희윤 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학창 시절, 내가 사는 세상은 좌파도 우파도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서아파(서태지와 아이들파)와 듀서파(듀스파)로 나뉘었다. 케이팝이란 말도, 케이인디란 말도 없던 시대였고, 록도 힙합도 TV로 배우던 때였다. 듀스는 당시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뉴 잭 스윙, 힙합, 24비트 랩의 선구자였으며, 나는 서아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듀스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춤, 패션, 태도에서 그들은 메이저이자 언더그라운드였고 힙스터이자 젊은 마스터였다. 1990년대의 젊음을 '정의를 거부하는' X세대라 말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중 적어도 1/4은 DEUX의 X일 것."
◆최승인 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듣게 된 이현도의 솔로 3집을 통해 그의 이전 그룹인 듀스를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김성재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됐다. 이후 여러 인터뷰와 회고를 보며 듀스가 남긴 영향력, 그리고 김성재가 당대에 어떤 존재였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됐다. 사진과 영상으로 남은 그의 스타일,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보며 한 시대의 아이콘이자 랩·힙합과 알앤비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우연히도 생전 김성재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캠퍼스 시절에는 홍대와 이태원 등지의 클럽에서 디제이들의 필살기처럼 흘러나오던 김성재와 듀스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때마다 그의 음악이 가진 멋과 생명력이 시대를 넘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훗날 '말하자면'의 리메이크에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것을 보았을 때는, 개인적인 기억과 음악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듯한 묘한 감정도 들었다. 결국 김성재가 여전히 기억되는 이유는 짧았지만 강렬했던 활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악과 무대, 스타일, 태도 자체가 한 세대의 감각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롤모델로 자리한 인물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음악이 반복해서 재발견되고, 새로운 세대에게도 여전히 생동감 있게 들리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용환 프리랜서 에디터(한대음 선정위원)
"정작 듀스의 음악을 접한 건 해체 이후였지만, 그들의 사운드와 가사, 춤, 패션까지, 모든 것은 내 유년기 감각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오히려 듀스의 대단함은 더 크게 다가온다. 두 사람이 90년대 선보인 모든 것들이 당시 얼마나 새롭고 특별했던 것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비로소 실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의 유산은 지금도 한국 힙합과 케이팝, 스트리트 패션까지 문화 전반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무대 위 스물세 살의 모습으로 남은 김성재는 90년대 새로운 세대의 멋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것이 20년이 지나도 BTS가 '말하자면'을 다시 부르고, 30년이 지나도 식케이가 '뉴 김성재'를 자처하는 이유다."
◆황선업 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김성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무대를 생방송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듀스의 해체를 아쉬워하던 이들에게 있어, 김성재씨의 무대는 그 아쉬움을 상쇄할만한 압도적인 에너지와 카리스마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룹의 유산이 앞으로도 유의미한 족적을 남길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그리고 앞으로 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던 순간이었다. 그 태동이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 그 무한한 가능성을 남겨두고 너무나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에 그 그리움이 더욱 배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만약 그가 계속 활동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유효한 이유도, 그가 보여준 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30주기를 맞는 지금도, 그 미완의 가능성은 여전히 한국 대중음악의 가슴 아픈 여백으로 남아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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