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용돈을 1000원 정도 받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내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종종 마트에 갔다. 엄마가 야채 코너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나는 언제나 군것질 코너를 힐끗거렸다. 지금은 별로 찾지도 않는 간식을 그때는 왜 그렇게 찾아 헤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식이란 무작정 떼를 쓴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최대한 얌전한 아이 흉내를 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먹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내민 결재 서류에 선뜻 도장을 찍어주는 엄마는 별로 없을 게 뻔한데도 일단 내밀어본다. 그날도 어김없이 서류는 반려됐고, 나는 커다란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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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섰다. 한여름이었다. 가게가 어두컴컴해서 바깥 햇빛이 강하면 실내 형광등이 빛을 잃었다.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가게 문턱을 넘었다. 입구 정면에는 간식거리가 잔뜩 쌓인 진열장이 놓여 있고, 가게 주인이 앉아 있는 계산대 맞은편 천장 모서리에는 가게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원경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간식을 고르는 척하며 작은 초콜릿 몇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게 심장이 달려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낄 정도였지만, 이내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두 다리는 벌벌 떨었다. 손을 적신 흥건한 땀을 허리춤에 닦으며 자연스럽게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영 살 게 없다는 투로 인사하며 입구를 나서는데, 가게 주인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얘들아. 너희 다 이리 와봐.” 심장이 나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게 주인은 기어코 뒷말을 뱉었다. “주머니에 있는 것 다 꺼내보렴.” 다정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가게 주인은 우리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모든 상황을 모서리에 달린 거울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초등학교에 다니냐는 질문부터 이름과 집 전화번호를 묻는 가게 주인에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크게 혼이 난 우리는 텅 빈 주머니를 대롱대롱 매달고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눈물이 계속 났다. 퉁퉁 부은 눈으로 놀이터 구석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를 꺼내 펼쳤다. 그러곤 하나님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교회 문턱 한 번 넘어본 적 없는 삼총사였지만, 하나님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편지를 뻔뻔하게 적어 내려갔다. 하나님만 아는 첫 번째 비밀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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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이란 뭘까. 영양학적으로 절대 주식이 될 수 없고, 그런 탓에 맛은 더 좋고, 아이들에게는 잘 내주지 않기 때문에 더 귀한 것. 내가 지금 간식을 잘 찾지 않는 이유는 원한다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때의 간식은 종종 나쁜 짓을 하게 만들고, 욕심을 부리게 했다. 300원짜리 컵 떡볶이를 동생에게 빼앗기기 싫어 한 입에 털어 넣고는 잔뜩 체하게 만들었고, 100원이었던 ‘새콤달콤’을 입천장에 붙이고 안 먹은 척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우리 집 대표 먹보이자 둘째 고양이인 앙꼬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간식을 너무 사랑하는 앙꼬. 가게 사장님이 나를 용서했으니, 나도 앙꼬의 간식에 대한 열망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앙꼬는 간식을 훔치지 않아도 가끔 안 먹은 척하면서 또 다른 고양이 접시에 머리를 들이밀곤 한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잔뜩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이 세상과 기술을 발전하게 하는 걸까? 어린이 영양제 ‘텐텐’이나 ‘비타쮸’ 같은 것은 그런 마음들이 탄생시킨 게 분명하다.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과 먹이기 어려운 영양제를 함께 먹일 수 있는, 딸기 먹고 딸기씨 먹이는 법 같은 것. 그렇게 애들도, 나도 만족할 수 있는 ‘고양이용 텐텐’을 아침마다 먹이기로 합의했다. 일종의 루틴이 생긴 셈이다. 내 아침밥을 먼저 챙겨 먹고 애들 영양제 간식 먹이기.
고양이들은 루틴이 정확할수록 행복해한다는데 과연 그랬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아침밥을 먹고 있으면 곧 간식 시간이란 걸 알고 기대에 부푼다. 내 마지막 숟가락질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냉장고 앞에 선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참으로 설레지. 어린 왕자도 그런 마음으로 4시에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신은 3시부터 행복할 거라고 말한 거겠지? 아침 9시 30분마다 밤새 나를 찾아 헤맨 것처럼 한참 부비적거리는 막내 삼삼이의 의도가 궁금했는데 간식이었다. 간식은 이렇게 ‘9시 30분 요정’을 탄생시켰다.
앙꼬는 네 마리 고양이 중에서 유일하게 간식으로 “앉아”와 “기다려”를 깨우친 고양이다. 자신의 몫을 다 먹고 느리게 먹는 ‘땅이’나 ‘삼삼이’ 그릇으로 돌진하려 할 때(자기보다 연장자인 슈짱의 몫은 건들지 않는다) “기다려”나 “앉아”를 외치면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서는 능력자다. 다른 애들이 간식을 남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리는 앙꼬를 보면서 엄마가 결재 서류를 반려했던 수많은 날을 떠올린다. 시무룩했던 나와 하나님만 알고 있는 그날의 사건 그리고 지금 저 애절한 눈빛의 앙꼬까지. 우리는 열망까지 닮았다.
손수현
대한민국 배우이자 작가. 드라마 〈블러드〉 〈막돼먹은 영애씨〉와 영화 〈마더 인 로〉 〈럭키, 아파트〉 등에 출연했다. 단편 〈프리랜서〉와 〈선풍기를 고치는 방법〉을 연출했으며, 저서로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와 〈새드 투게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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