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 천불은 ‘많다’는 의미다. 부처님 모신 석굴은 남쪽 492개, 승려들이 살았던 북쪽 240여개 등 전체 석굴 수는 730여개다.
‘종교와 신(神)’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화다. ‘신과 종교’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라는 말이 있다. 신을 발명한 인간은 신도 인간처럼 선물을 좋아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제물과 공물을 신에게 바치고 많은 돈을 들여 신이 사는 화려한 성전을 건설했다.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의 신이라 생각하고 다른 신을 믿는 종족과 전쟁을 벌이고 이교도를 박해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종교의 길’이다. 서쪽에서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등이 동쪽 중국으로 왔다.
막고굴의 앞면은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밍사산 절벽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양옆은 포플러 나무가 무성하다. 이곳 개천의 진흙으로 불상을 만들고 물은 승려들의 식수원이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꼭 한 도시만 가라고 한다면 둔황석굴을 가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둔황석굴의 시작은 서기 366년 ‘낙준’이라는 떠돌이 승려가 밍사산 옆을 지나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고 절벽 바위에 굴을 파고 수도를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역대 왕조가 492개의 석굴을 조성했는데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었다. 당나라 시대 225개, 수나라 97개, 토번(티베트) 시대에 70개가 조성됐다.
둔황석굴은 세 가지 문화적 가치가 있다. 첫째는 진흙으로 빚은 수많은 부처와 보살 소상(塑像)이 약 1천700개라고 한다. 부처 소상은 무게와 크기 때문에 약탈을 면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부처, 보살 등 소조불(塑造佛)은 근처 개천의 진흙으로 만들었다. 장인들이 진흙에 볏짚, 양털, 꿀, 광물질 등을 섞어 만든 것으로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두 번째는 모든 석굴의 벽면과 천장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색한 엄청난 벽화다. 석굴 전체 벽화 길이가 5m 폭으로 계산하면 50㎞에 달한다고 한다. 부처 소상과 벽화의 안료는 공작석(초록색 염료), 청금석(푸른색 염료) 등 서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안료로 만들었다. 세 번째는 17호 장경동 석굴에서 발견된 4만여권의 장서다. 17호굴(관리상 일련번호)은 ‘도서관 석굴’ 장경동(藏經洞·Library Cave )이라 부른다.
둔황석굴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00년 17호 장경동 발견 때문이다. 장경동 석굴은 세 사람이 주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 도교 도사인 왕원록(왕도사),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다. 900년 동안 숨겨져 있던 장경동 17호 석굴을 발견한 얘기는 매우 흥미롭다. 왕도사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도교 도사가 된 사람이다.
1900년 장경동 석굴 발견 당시 왕도사는 폐허 수준인 16호 석굴에서 조수 한 사람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왕도사는 조수를 크게 꾸짖는 일이 발생했다. 조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삭이다가 16호 석굴 벽면에 담뱃대를 툭툭 털었는데 벽에서 울림이 있는 공명 소리를 듣게 된다. 왕도사와 조수는 이상하게 생각해 벽을 허물었더니 벽 속에 작은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4만여점에 달하는 각종 종교의 경전, 계약서류, 편지, 비단 그림 등이 들어 있었다. 석굴의 폐쇄된 연도는 조사한 결과 1002년이다. 9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타임캡슐이 개봉된 것이다.
인도에 있던 영국인 고고학자 겸 탐험가 스타인은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둔황에 와서 1907년 왕도사를 설득해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이후 고문서 소문을 들은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도 1908년 둔황에 도착해 역시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장경동 서적은 한자, 산스크리스트어, 티베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고대 문서의 타임캡슐이다. 희귀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경전도 있고 히브리어로 된 기독교 기도문 등 다양한 종교자료가 있다.
사서(史書)에 없는 서민들의 실상, 없어진 고대 문자, 사라진 마니교 등 경전 등이 귀중한 ‘둔황학’의 배경이다.
1908년 펠리오가 가져간 서적 중에 혜초 스님(704~787)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돼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고, 앞뒤 표지가 없는 6천여자의 요약본 서류였다. 펠리오는 이 문서를 연구해 1909년 당나라 혜초 스님의 여행기라는 사실을 논문에 발표했다. 1915년 일본 학자 가카쿠스 준지로가 혜초의 국적이 당나라가 아닌 ‘신라’ 승려임을 밝혔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년경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의 오천축(동서남북과 중앙)과 중앙아시아 40여개국을 다녀온 여행기다. 중국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갔다가 귀국은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사막 등을 거쳐 육로로 왔다. 왕오천축국전은 간략한 자료지만 1천300년 전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의 풍속, 종교,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다. 원본은 상중하 3권으로 추정되는 데 분실됐다.
혜초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북부 등을 다녀온 최초의 한민족 모험가이자 세계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300년 전 20대 신라 젊은이가 혈혈단신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무전(無錢)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로 향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멋진 모델이다. 둔황석굴에 신라 관련 석굴 두 개가 더 있다. 61호 석굴의 벽화 ‘오대산도’에 신라 사찰 송공사와 신라인 5명의 그림이 있다. 355호 석굴은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나온다. 경주에서 사신으로 장안에 갔던 관리들이 왕족의 부탁으로 멀리 둔황에 간 흔적이다. 신라인들이 실크로드 중심도시 둔황까지 진취적으로 왕래했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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