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책 『한시 미학 산책』에서 재미있는 시 한 대목을 만났습니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옵거늘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낭군이 어이해 견우이시리오. (郞豈是牽牛. 낭기시견우)
조원(趙瑗. 1544∼1595)의 첩 이 씨가 이웃 아낙을 대신하여 쓴 소장(訴狀) 말미에 첨기한 시입니다. 남편이 소를 훔친 혐의를 받는 이 아낙의 요청을 이 씨는 외면할 수 없었지요. 견우를 글자 그대로 풀면 '소를 끌다'가 됩니다. 자신이 직녀가 아닌데 남편이 견우(소도둑)가 될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크게 소리치지 않고도 재치 있게 할 말 했습니다. 태수도 이 글을 기특하게 여겨 이웃 아낙의 남편을 풀어줬다고 책은 설명합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전하는 이야기랍니다.
첩 이 씨로 소개된 이 사람, 알고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네요. 생몰 연대가 1550∼1600년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조선 시대 대표 여류 시인 이옥봉(李玉峰)입니다. 본명이 이숙원(李淑媛)이라는 옥봉은 옥천 군수의 서녀로 태어나 그 유명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인 조원의 부실(副室. 첩)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가 남긴 시 수십 편 중에는 이런 것(몽혼. 夢魂)도 있습니다.
요사이 안부가 어떠신지 여쭈어봅니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달이 비단 창문에 이를 때면 이내 몸은 한스러움이 많답니다.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만일 꿈속의 넋이 다니는 길에 흔적이 있는 것이라면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겠지요.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일설에 따르면 옥봉은 이웃 아낙의 그 소장을 써준 뒤 남편의 미움을 사 친정으로 쫓겨났답니다. 그런 신세에 몰렸음에도 남편을 그리는 마음이 절절합니다. 돌이 모래가 되었을 거라니요…….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정민, 『한시 미학 산책』, 휴머니스트, 2020 (서울 도서관 전자책, 유통사 ECO)
2. 한국경제 The pen [한시공방(漢詩工房)] 夢魂(몽혼), 李玉峰(이옥봉) (필자 강성위, 입력 2023.05.09 10:00 수정 2023.05.09 10:00)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05066851Q
3. 김형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아시아, 2014 (성남시 전자도서관, 제공처 교보문고)
4. 숙명여대 도서관 세계여성문학관 상세보기 이옥봉 : 李玉峰 - https://wowlic.sookmyung.ac.kr/search/detail/WACWAZ00000000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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