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케이시는 1970년대에 해저에서 송유관을 설치하는 일을 했다. 그때의 장애물은 상어도, 가오리도 아닌 장어였다. “나이지리아 연안의 온네 해역에서였어요. 송유관 끝에 거대한 조개껍데기 모양의 보호 장치가 있었죠.” 지금은 영국 햄프셔 고스포트의 다이빙 박물관 관장으로 일하는 그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안을 들여다보니 입만 보일 정도로 커다란 장어 한 마리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지만, 잠수라는 게 그래요. 일을 맡은 사람이 끝마쳐야 하거든요. 그래서 가장 큰 쇠지렛대를 집어 들고 파이프 가장자리에 서서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난리가 났어요. 모래와 흙탕물이 휘몰아치고, 녀석은 미친 듯이 날뛰다 결국 도망갔습니다. 그제야 얼마나 거대한 놈인지 알았어요. 만약 그놈이 입을 열고 덮쳤다면 전 이미 끝장이었을 겁니다.”
블랑팡은 오션 커밋 프로젝트를 통해 알렉시스 샤푸이(Alexis Chappuis)가 이끄는 언씬(UNSEEN Expeditions), 바이오픽셀 오션스 재단 곰베싸 탐사 프로젝트(Gombessa Expeditions)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다에 대한 지식 보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석유산업 잠수부로 40년을 일한 케이시는 롤렉스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의 손목에는 스테인리스스틸 베젤이 장착된 최초의 씨-드웰러(Sea-dweller)가 있었다. 해저의 화학반응으로 기존 합금 베젤이 부식될 수 있다고 롤렉스를 설득하자, 특별히 자신을 위해 제작해준 모델이라고 한다. 케이시가 건넨 시계는 묵직한 무게와 아름다운 파티나로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땐 우리 모두 롤렉스를 찼죠. 잠수부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 같은 거였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다이버 워치만큼 강렬한 매혹과 신비를 동시에 지닌 시계가 또 있을까? 시계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카테고리 중 하나이며, 비공식적으로는 ‘가장 인기 있는 장르’라 불린다. 웬만한 브랜드라면 다이버 워치 하나쯤은 꼭 내놓으며, 때로는 그것이 브랜드 부활의 결정적 계기가 될 때도 있다. 오메가의 씨마스터 300이 제임스 본드의 시계로 자리 잡으며 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세운 사례나, 2012년 튜더를 다시 끌어올린 블랙 베이가 대표적이다. 이 성공은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다이버 워치의 본래 기능은 이미 오래전에 컴퓨터에 자리를 내주었고, 수천 피트 방수 성능이라는 장점도 실제 인간이 도달한 최대 심해 1090피트와는 간극이 크다. 그럼에도 다이버 워치에는 고유한 역사적 맥락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작고 정교한 톱니바퀴와 다이얼 속에 인간의 탐험 정신과 용기, 광기, 때로는 무모함과 어둠까지 응축해 담아낸 기계는 세상에 유일하다.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는 1954년 출시된 롤렉스 서브마리너와 함께 ‘최초의 다이버 워치’로 흔히 언급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 다이버 워치의 핵심 가치를 ‘바다 깊은 곳의 혹독한 환경을 견디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진다. 1932년, 코르크로 밀폐된 이중 잠금 방수 케이스를 장착한 오메가의 마린은 어떻고, 1926년 특허를 받은 롤렉스의 오리지널 오이스터,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경이의 시계’는 또 어떤가? 그러나 이들 역시 ‘최초’는 아니다. 그 발상을 가장 먼저 현실로 만든 주인공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최근 블랑팡은 언씬과 협력해 인도네시아의 심해 산호초 생태계를 연구하고 보호하는 데 필요한 지원들을 제공했으며, 여러 해양 탐사를 통해 전 세계 해양보호구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사실 순수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다이버 워치의 기원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발상은 스위스가 아니었다. 적어도 전적으로는 말이다. 실제 이야기는 1918년, 이탈리아 해군 장교 라파엘레 로세티(Raffaele Rossetti)에서 비롯된다. 그는 적함을 침몰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구상했다. 멀리서 미사일을 쏘는 대신, 아예 가까이 접근해 빗맞을 가능성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누군가 그 미사일에 올라타 직접 조종한다면? 그는 두 명이 함께 탑승해 표적을 향해 몰고 갈 수 있는 어뢰를 개발했다. 하지만 가미카제식 자폭 대신 자석식 기뢰를 붙이고 빠져나오는 방식을 택했다. 그의 어뢰는 실제로 오스트리아 전함을 침몰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호흡 장비가 없어 탑승자들이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고 항해해야 했고, 결국 쉽게 발각돼 붙잡히고 만 것이다. 20년이 지나서야 이탈리아 해군은 호흡 장비를 추가해 어뢰를 본격적으로 수중에서 운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잠수부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임무가 제시간에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군은 1935년, 계기와 장비를 공급하던 주세페 파네라이(Giuseppe Panerai)에게 이를 의뢰했다. 파네라이는 롤렉스 무브먼트를 들여와 그 위에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라듐 도료인 라디오미르(Radiomir)를 사용했는데, 당시에는 방사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곧 다른 소재로 대체되었다. “그건 시계라기보다 군용 장비에 가까웠습니다.” 현재 파네라이 CEO 장-마르크 퐁트루에(Jean-Marc Pontroué)의 말이다.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읽어야 했기에 시계는 클 수밖에 없었죠. 수심 30m만 들어가도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큼직한 숫자, 단 두 개의 바늘, 초침도 합병 기능 없는 단순한 구성과 강력한 방수 성능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 시계는 훗날 라디오미르(Radiomir)로 발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탈리아 특수부대에 지급되었다. 파네라이는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이탈리아군에 시계와 장비를 공급했으며, 1993년에야 민간 판매를 시작했다. 현재는 이탈리아 아메리카컵 요트팀은 물론 전국 다이빙 클럽과도 협력하고 있다. 파네라이는 특히 ‘파네리스티(Paneristi)’라 불리는 열성적인 추종자들로 유명하다. 이들은 희귀한 모델을 추적하고 수집하며 브랜드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물론 과거에는 다른 제조사의 무브먼트에 의존했고 경쟁사들처럼 무브먼트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아니지만, 다이빙 역사에서 맡은 역할만큼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퐁트루에는 말한다. “군사적 배경과 역사적 다이빙의 전통, 바로 그 두 요소가 파네리스티들의 헌신을 설명합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기도 하죠.”
엄밀히 따지면 다이버 워치는 국제표준화기구(ISO)의 6425 규격을 통과해야 한다. 이 규격은 호흡 장비를 착용한 채 수심 100m(330피트) 이상에서 잠수할 때 시계가 충족해야 할 기준을 정해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다이브 워치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회전 베젤(잠수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 일반적인 스쿠버다이빙은 보통 30~50분 지속된다)과 기타 타이밍 기능은 ISO 6425 규격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잠수에서는 필수다. 잠수 과정에서 잠수부의 몸에는 복잡하고, 경우에 따라 치명적일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산소 21%, 질소 78%로 구성돼 있다. 지상에서는 질소가 몸을 그냥 통과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스쿠버 실린더 안에서는 이 공기가 제곱인치당 3000파운드의 압력으로 압축된다. 그리고 잠수부에게는 잠수 깊이와 물의 압력에 맞춰 이 공기를 조절해 공급해야 한다. 문제는 수심이 깊어질수록 몸이 기체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산소는 독성을 띠기 시작하고, 질소는 취한 듯한 상태를 유발하며 기포 형태로 근육 속에 스며든다. 이 기포를 제거하려면 특정 수심에서 잠시 머물며 질소를 뱉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수면으로 올라올 때 기포가 팽창해 척추와 관절, 폐에 극심한 통증을 얻게 된다. 이게 바로 ‘감압병(the bends)’이다.
1940년대 이전까지 잠수부들은 방수 시계와 감압표에 의존했지만, 1940년대 중반 자크 이브 쿠스토(Jacques Cousteau)와 에밀 가냥(Emile Gagnan)이 아쿠아렁(Aqua-Lung)을 발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쿠아렁은 기존 호흡 장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잠수부들이 더 깊고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바다의 비밀에 사로잡힌 프랑스 해군 장교 쿠스토는 촬영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 장치를 고안했다. 아쿠아렁은 1946년 시판되었고, 전쟁 후 불하된 군용 매장에서 웨트 슈트와 각종 잠수 장비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다이빙은 곧 폭발적인 유행으로 번졌다. 군 장비가 고갈되자 사람들은 다시 ‘스킨 다이빙’으로 돌아갔고, 1951년에는 다이버들을 위한 잡지 〈스킨 다이버〉가 창간되었다. 잡지는 잠수 장비 광고와 공기 압축 작살총으로 사냥한 물고기와 바닷가재를 들고 포즈를 취한 남성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스킨 다이버〉의 마초적인 보도는 종종 잠수부들이 위험에 빠진 사례를 담았다. 창간호에 실린 타히티 진주 채취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25세 잠수부는 하루 60달러를 벌었지만, 산소 부족으로 뇌세포 일부가 손상되면서 펀치드렁크 상태(권투선수처럼 반복된 뇌 손상으로 비틀거리는 상태)에 빠졌다.” 또 다른 기사에는 “나는 진주를 채집하는 잠수부들이 죽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한 30세 잠수부는 자신이 수심 20패덤(37m)까지 잠수할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더니 결국 기절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분명 잠수부들은 시간을 확인하고 산소 잔량을 관리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 시장의 빈틈을 파고들어, 잠수부들의 심장과 폐를 놓고 벌어진 경쟁에서 첫 승리를 거머쥔 건 스위스 르 브라쉬(Le Brassus)의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였다. 장-자크 피슈테르(Jean-Jacques Fiechter)는 다이빙 열풍에 깊이 빠져든 기업인이자 블랑팡의 CEO였다. 1950년대 초, 프랑스 해안에서 잠수를 하던 그는 산소가 바닥나 감압 정지 없이 급히 수면으로 올라와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감압병 위험에 직면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곧 세계 최초의 현대적 다이버 워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블랑팡의 초기 개발은 한 프랑스 군인의 긴급한 요청으로 더욱 속도가 붙었다. 밥 말루비에(Bob Maloubier)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비밀 요원으로 활약했던, 이름난 독불장군형 전투원이었다. 1952년, 프랑스 국방부는 적진 깊숙이 잠입해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는 정예 군 잠수부 부대, ‘나죄르 드 콩바(Nageurs de Combat)’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고, 알제리에 주둔 중이던 말루비에는 이 임무를 맡을 적임자였다. 그는 감압 시간을 비롯해 여러 요소를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특수부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프랑스에서 제조사를 찾는 데 실패한 그는 블랑팡에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1953년 절제된 디자인의 단색 시계 피프티 패덤즈가 탄생했다. (이 이름은 300피트, 즉 약 91.4m의 수심을 뜻한다.) 이 시계는 신세대 해저 탐험가들의 상상력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쿠스토와 그의 잠수부들은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Le Monde du Silence)〉에서 이를 착용했고, TV 스타 로이드 브리지스(Lloyd Bridges) 역시 잡지 〈스킨 다이버〉 표지에 이 시계를 차고 등장했다. 1958년에는 미 해군 네이비 실(US Navy SEALs)과 전투 잠수부들의 표준 장비로 지정되었다.
레저 다이빙의 황금기는 1953년 발간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해저 고고학 탐사 특집 기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마르세유 해안에서 쿠스토가 진행한 이 기사는 아쿠아렁과 잠수 장비, 그리고 이후 등장한 수중 카메라를 비롯해 다양한 장비의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피프티 패덤즈 이후 서브마리너, 조디악 씨울프, 오메가 씨마스터가 차례로 등장하면서, 보다 단순한 ‘스킨 다이버 워치’들이 쏟아졌다. 100~200m 방수 성능에 돔 형태 케이스, 동전 모양 베젤을 갖춘 기본적이고 저렴한 모델들이었다. 이 시기 롤렉스는 영리하게도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했다. 깊은 바다에서 견디는 시계라면 육지에서는 더욱 신뢰할 만하다는 메시지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물론 숙련된 잠수부들은 초보들이 “얼마나 깊이 내려가봤느냐”는 질문에 비웃었지만 말이다. (“30피트 아래로 내려가면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여요,” 케이시는 회상한다.)
1960년, 스위스의 해양학자 자크 피카르(Jacques Piccard)와 미 해군 중위 돈 월시(Don Walsh)가 바티스카프를 몰아 마리아나 해구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선체 외부에는 롤렉스의 실험용 시계 ‘딥 씨 스페셜(Deep Sea Special)’이 부착돼 있었다. 그곳은 시계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깊이였다. 이를 계기로 서브마리너는 대중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숀 코너리(Sean Connery)가 출연한 첫 10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그의 손목에 있었던 시계가 바로 서브마리너였다.
1965년작 〈007 썬더볼(Thunderball) 작전〉은 장대한 작살총 전투 장면으로 수중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무렵 바닷속 모험은 곳곳에서 다뤄졌다. 1960년대 과학적 도전 정신을 상징하는 무대였던 셈이다. 작전 페티코트(Operation Petticoat), 썬더버드(Thunderbirds), 얼음 요새 제브라(Ice Station Zebra) 같은 영화는 물론이고, 의식 확장의 실험조차 바다에서 영감을 얻었다. 쿠스토의 영화들은 수중에서 색채가 변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물은 빨강과 주황을 흡수해 맨눈에는 파랑과 초록으로 보인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사이키델릭 문화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실제로 존 레넌은 1965년 처음 LSD를 복용했을 때 조지 해리슨의 방갈로를 거대한 잠수함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이 환상이 비틀스의 ‘옐로 서브마린(Yellow Submarine)’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폴 매카트니는 그 아이디어를 그리스 휴가에서 얻었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Octopus’s Garden’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롤렉스의 ‘퍼페추얼 플래닛’ 이니셔티브가 후원한 수누안-하(Xunaan-Ha) 탐사대의 잠수부들. 이들은 멕시코 유카탄 거대 대수층의 동굴 시스템을 탐험하며 오염된 수원의 근원을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공상과는 거리가 먼 케이시조차 이 연결이 전혀 터무니없지 않다고 말한다. “정말 놀라운 것들을 보게 돼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되고요. 시추 작업을 시작하려 해저 바닥을 걷던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지금 나는 인류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구나. 다른 사람들도 내가 보는 걸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케이시와 동료들이 해저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던 건 ‘포화잠수’라는 신기술 덕분이었다. 1960년대 중반 도입돼, 1970년대 영국 석유 붐과 맞물려 발전한 방식이다. 포화잠수부들은 말 그대로 하드코어였다. 작업 중에는 감압을 하지 않고, 임무가 끝날 때까지 고압 환경이 유지되는 생활 모듈 안에서 지내야 했다. 게다가 실험적인 혼합 기체를 사용했는데,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는 이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테스트 같은 건 거의 없었죠.” 케이시는 회상한다. “에너지 위기 때문에 기름을 무조건 뽑아내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나 잠수할 줄 안다’ 하면 바로 잠수부로 투입됐어요. 저도 곧바로 시추선을 지원하는 보트에 올라탔고요. 깨끗하게 일만 하면 돈도 꽤 많이 받았죠.”
포화잠수부들에게는 더 튼튼하고 성능이 강력한 시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시계 회사들은 단순한 방수나 타이밍 기능을 넘어선 새로운 요구에 눈을 돌렸다. 이 시기에 몇몇 브랜드는 수심에서 축적되는 헬륨을 배출할 수 있는 이스케이프 밸브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케이시는 1980년대 다이브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조차 은퇴 직전까지 자신의 씨-드웰러를 착용했다. “우리에게 다이버 워치는 다른 번지르르한 시계들과는 달랐어요. 지금처럼 비싼 것도 아니었고요. 당시엔 몇백 파운드면 살 수 있었고 급여도 충분했죠. 시간이 좀 남거나 보너스를 받으면 ‘새 롤렉스 하나 사러 간다’ 하고 그냥 보석상에 들렀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게 그렇게 값비싼 시계가 된 걸 알고 정말 충격받았죠. 물속에서는 더 이상 차지 않아요.”
정말 놀라운 것들을 보게 돼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되고요. 해저 바닥을 걷던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지금 나는 인류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구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등장한 다이버 워치들은 새로운 기능과 더 단단한 케이스로 무장하며 점점 크고 복잡해졌다. 그중 상당수는 지금도 ‘컬트 워치’라 불린다. 1968년작 독사의 ‘서브 300T’, 1975년작 세이코의 ‘튜나’(참치 캔을 연상케 하는 크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오메가의 ‘엘리펀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계들은 당시 마초적인 해양 영화들의 이미지를 실물로 구현해낸 듯했다. 스필버그의 〈죠스〉에서는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알스타를 착용했고, 피터 예이츠의 〈딥〉에서는 닉 놀티가 서브마리너를, 로버트 쇼는 세이코 6217을 찼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 괴물 중의 괴물은 단연 오메가의 초대형 플롱주어 프로페셔널(Plongeur Professional), 일명 플로프롭 씨마스터였다. 손목을 꺾을 듯한 강철 덩어리였던 이 시계는 다이버 워치계의 ‘과잉의 아이콘’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작 앨범이나 1970년대 플랫폼 부츠처럼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오메가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너무 비쌌거든요.” 〈워치타임〉의 편집장 로저 루거(Roger Ruegger)가 말한다. “몇 개를 팔았든, 투자한 시간과 비용을 만회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출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컬트 워치로 남아 있습니다. 하드코어 잠수부들에게는 아이코닉한 존재였죠. 역사 다이빙협회 회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빈티지 플로프롭을 실제 잠수 때 착용합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요.”
그러던 198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의 잠수부 세 명이 오레아(Orea)라는 회사를 세웠다. 웨어러블 다이브 컴퓨터를 만드는 신생 기업들 중 하나였다. 이 장치는 알고리즘을 사용해 체내 가스 축적량과 ‘안전 상승 깊이’를 계산했으며, 1983년 마침내 시장에 첫 모델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오레아 에지(Orea Edge)는 675달러로 비쌌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실시간 데이터를 제공해 숙련된 잠수부들이 감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이브 컴퓨터만이 다이버 워치의 영광을 빼앗아간 건 아니었다. 쿼츠 혁명과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등장은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의 입지를 흔들었고, 1980년대가 끝날 무렵 다이버 워치는 마치 프로그레시브 록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전락했다.
말루쿠 군도의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무척추 동물을 찾아 내려가는 언씬 탐사원. 블랑팡과 언씬은 이 탐사를 통해 12종의 토착 생물과 30여 종의 물고기를 새로 발견했다.
다이버 워치의 부활은 흔히 1995년 영화 〈골든아이〉에서 씨마스터 300이 등장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나 루거의 기억은 다르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스위스에서 스와치 붐을 직접 겪으며 자랐고, 사람들이 1990년대 스와치의 ‘스쿠버’를 사기 위해 매장 앞에서 줄을 서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스쿠버는 방수 200m 성능을 갖췄지만, 어디까지나 포스트모던 스와치답게 실제 잠수용이라기보다 패션용에 가까운 시계였다. 이후 보라보라, 배리어 리프, 히포캄퍼스, 메두사, 블루문, 그리고 가장 유명한 1991년의 해피 피쉬 같은 시리즈가 이어졌다. “특히 그때의 스와치 스쿠버 모델들은 오늘날의 스마트폰처럼 매장 앞에서 밤샘 대기를 불러일으켰죠.” 루거는 회상한다. “그게 바로 다이버 워치 르네상스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이버 워치를 일상용 시계로 착용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든 거예요.” 이 부활은 1980년대의 매끈한 디자인에 대한 반작용이자, 1990년대에 불어온 1970년대 복고 열풍 덕분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오메가는 연간 5만 개의 씨마스터 300을 판매했다. 1993년에는 파네라이가 라디오미르를 전면에 내세우며 재출범했고, 이어 블랑팡은 피프티 패덤즈를, IWC는 아쿠아타이머를 다시 내놓았다. 여기에 2002년 브라이틀링이 방수 3000m 성능을 갖춘 최초의 기계식 다이버 워치를 출시했고, 지샥 프로그맨, 세이코 SKX, 수심계를 장착해 기술을 업그레이드한 IWC 딥 원 등이 뒤따랐다. 멋있고, 직관적이며, 스토리까지 갖춘 이 시계들은 스위스 시계산업을 다시 뜨겁게 달궜다.
물론 그 이면엔 그늘도 존재했다. 상어 가죽 스트랩, 바다를 부유층의 놀이터로 만든 태도, 잠수부들이 목숨을 잃은 무모한 기록 도전을 후원하던 관행까지. 다이버 워치의 부활은 1950년대식 사고방식을 일부 다시 불러왔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루거는 단언한다.
오늘날에도 다이버 워치—진의 U1, 리차드 밀의 투르비용 크로노그래프 같은 모델들—는 여전히 혁신을 이어가지만, 초점은 생태로 옮겨갔다. 잠수부들은 바다와 교감하며 보존에 힘쓰고, 제조사들은 해양 보호를 위해 투자한다. 특히 블랑팡의 노력은 두드러졌고, 이는 피프티 패덤즈의 명성을 정당하게 끌어올렸다. 이제 다이버 워치는 너무 대중적이어서 더 이상 ‘숨겨진 모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각 브랜드가 세상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에너지업계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유튜브 채널 노매드 다이브 로그(Nomad Dive Logs) 운영자인 개빈 흄스턴(Gavin Hulmston)은 이 새로운 정신을 체현한다. 그는 ‘테크니컬 다이버’로, 특수한 혼합 기체를 사용하고 감압 기술을 연구해 더 깊이, 더 오래 머무른다. 자랑하기 위한 게 아니라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감각, 홀로 멀리 떨어져 고요 속에 존재하는 평화를 느끼기 위해서다. 세계 곳곳의 난파선과 동굴을 탐험한 그의 고화질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잠수부를 ‘의식의 탐험가’라 부르는 발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에게 잠수는 극소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장소에 들어가, 육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해양 생물과 역사적 유물을 마주하는 기회예요. 그곳에 있으면 평화로워져요. 그보다 더 고요할 수는 없죠. 손전등을 끄면 그저 까만 어둠뿐이에요. 사람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평온과 안도, 그리고 고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곳에 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특권이에요.”
고스포트 다이빙 뮤지엄에서 케빈 케이시는 솔렌트 해협 위로 반짝이는 햇빛을 바라보다가, 뉴질랜드에서 송유관에 문제가 생겼던 일을 들려주었다. 촬영을 하려 잠수해 표시 장치를 설치하던 중 갑자기 카메라가 강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문어 한 마리가 카메라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녀석은 바위틈으로 카메라를 끌고 가려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문어들은 반짝이는 걸 좋아하거든요,” 케이시는 말한다. “근데 카메라는 내 잠수복에 연결돼 있었으니, 나까지 끌려가는 셈이었죠. 결국 문어와 한판 씨름을 벌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이겼습니다.” 그는 웃으며 덧붙인다. “문어가 롤렉스를 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은퇴한 지금, 그 시절이 그립냐는 질문에 케이시는 잠시 고개를 젓는다. “출근하는 건 그립지 않아요. 하지만 잠수는… 당연히 그립죠. 물만 봐도 늘 생각이 나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시늉을 하며 미소 지었다.
Copyright ⓒ 에스콰이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