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남승원 평론가가 한국작가회의의 비평 분과장을 맡으면서 활동의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기획을 거들고 있다는 이야기 끝에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로 알려진 김주혜 작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했는데 그 정도가 팬덤 수준이라 조금 의아했다. 비교적 객관화된 글쓰기로 훈련된 평론가가 어떤 작가에게 열광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어서 그만큼 부럽기도 했다.
문학관에 특강으로라도 초청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를 모신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예산 핑계를 대어 보나 실은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냥 기획자로서가 아니라 중뿔난 동료 작가라는 자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주빈 작가로 입국한다는 정보를 슬쩍 흘려준다. 비밀정보를 귀띔이라도 하듯이. 남승원 평론가의 장난기 어린 눈과 내 눈이 쨍, 하고 부딪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침내 노작홍사용문학관으로 작가를 이끌었다. 문학관 개관 이래 가장 많은 시민이 몰려들었다. 문학관 사무국장 박정석 시인의 말로는 타 도시의 시민들 문의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내 눈에도 초면인 눈빛들이 여럿 보였다. 베스트셀러나 작가의 허명이 아니라 인간 김주혜에게 매료된 진성 독자들이 틀림없었다. 무엇이 그들을 한 작가를 향해 몰려들게 한 것일까.
어떤 강연은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청중을 들어올린다. 문학의 본디 모습이다. 거기엔 지식의 나열이나 자극을 넘어서는 울림이 있다. 그날 강연 중에 90석 규모의 소극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전체 맥락과 분위기를 전하기엔 역부족이나 그날 강연을 요약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 하나. ‘초청받아 간 아프리카의 황폐한 들판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개가 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작가가 들고 있던 생수병의 물을 주었다. 그리고 식량으로 들고 있던 만두도 나누어 주었다. 개는 아무런 의지 없이 고개를 돌린다. 현지인들은 그런 작가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웃다가 자신들이 품고 있던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는데 개는 겨우 한 술 뜨다 만다. 작가는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유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같은 생명을 타고나 저리 굶주린 채 죽어가고 있는가. 신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통증이 온다. 그것이 눈물을 쏟게 한다. 예술은 이 같은 질문과 통증으로부터 하염없이 샘솟는 샘물이 아닌가.’
그 둘. ‘작가가 톨스토이문학상 상금을 호랑이 보호기금으로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책임자에게 향후 5년 동안의 보호 활동계획을 듣고 싶다고 한다. 거금이니 그만한 요청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책임자는 대뜸 5년이 아니라 수십년의 기간을 두고 생각하라 한다. 그런 마음이 아니면 기금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5년이 아니라 30년, 40년의 지원이 가능한 가치라는 확신이 들 때 지원하라는 답을 듣고 작가는 반성한다. 일순간의 연민이나 연대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서 작가는 지속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했다.
마지막 에피소드. ‘새끼 새가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나무 위에서 부모로 보이는 새들이 울고 있었다. 사뭇 애절했다. 작가가 죽은 새에게 다가가자 주변 사람들이 조류독감이며 이런저런 바이러스를 경계하며 손사래를 친다.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나무의 새들은 울고 있었다. 작가는 종이박스를 관으로 삼아 나무 위의 새들에게 보여준다. 이제 아기와 작별을 고하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일은 없게 내가 장례를 치러줄게. 작가는 눈이 마주친 어미 새들이 놀라 달아나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나무 위로 들어올린다. 그 과정을 새들이 가만히 지켜본다. 나무 아래 매장을 마치자 새들은 울음을 그치고 날아간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문학이든 사람이든 뭐든 이해하려고만 했던 게 아닐까.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다. 문학은 눈물이자 사랑이고, 사랑은 눈물을 움직이는 역동성을 발휘한다. 임종을 앞둔 개와 멸종돼 가는 호랑이와 새의 주검 앞에 선 자의 눈물은 오래전에 우리 공동체가 품고 있었으나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가치다. 모국을 떠난 작가가 본 한국문학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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