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한국 자본주의의 원형을 세운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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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한국 자본주의의 원형을 세운 사상가

월간기후변화 2025-11-11 10:17:00 신고

 

▲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기업인의 범주를 넘어 한국 자본주의의 설계자이자 산업 근대화의 기획자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곧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학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며 전통의 도덕과 규율 속에 성장했다.

 

그러나 시대는 전통을 허물고 근대라는 새로운 문을 열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농사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성으로 향했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며 자본주의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익혔고, 그것이 훗날 한국 경제사에서 결정적인 사고의 기반이 된다.

 

젊은 시절의 그는 돈을 벌고자 한 상인이 아니라, 근대화의 필연을 꿰뚫어본 현실주의자였다.

 

1938년, 대구 수동의 한 허름한 상가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며 그의 상업 인생이 시작됐다. 청과류와 어물을 중국에 수출하던 작은 무역상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이미 그때부터 ‘거래’가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었다.

 

상품을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라, 유통망과 시장 구조를 구축하는 자로서 자신을 규정했다. 일제의 경제 통제 아래에서조차 그는 ‘국가 없는 상업’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혼란의 시기,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질서를 감지했다.

 

일본이 물러난 공백 속에서 한국 경제를 일으킬 자는 국가가 아닌 기업이라는 신념이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그의 좌우명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국력의 기초를 기업이 담당해야 한다는 철저한 현실 인식의 결과였다.

 

이병철은 1953년 제일제당을 세우며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당시 한국의 산업 기반은 거의 전무했고, 대부분의 기업이 수입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공 산업’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쌀과 설탕, 밀가루 같은 기초식품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산업의 기초였고, 이를 국산화하는 것이 곧 자립이었다. 제일제당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어 제일모직, 삼성물산, 그리고 1969년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산업 전환의 연쇄는 한국 재벌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삼성’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처럼 세상에 빛나는 세 개의 별을 꿈꾸었다. 그것은 무역, 제조, 금융이라는 세 축이었다. 이병철은 돈을 버는 기술이 아니라, 돈이 국가를 움직이는 방식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명료했다. ‘인재제일, 사업보국, 합리추구’. 그는 늘 “사람이 기업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에게 인재는 충성이나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와 창조의 주체였다. 삼성이 초기부터 교육과 연구에 집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경영의 핵심을 ‘합리’로 두었다. 감정이나 의리로 움직이는 한국식 인간관계를 극도로 경계했다. “기업은 가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당시의 시대상에서 보면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동시에 그는 불교적 사유와 유교적 윤리를 절묘하게 융합한 독특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경영은 곧 수행이며, 기업은 한 사람의 욕망을 넘어선 공동체라는 인식이 그에게 있었다. 이병철의 사무실 책상에는 늘 불경과 경제서가 함께 놓여 있었다. 이 ‘호암정신’은 한국형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로 남았다.

 

그는 산업가이면서 동시에 문화인, 교육인이었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을 세워 한국 예술과 학문 발전에 힘썼고, 1982년에는 ‘호암미술관’을 설립하여 조선미술의 정수와 한국미의 맥을 복원하려 했다. 그에게 미술관은 단순한 수집 공간이 아니라, ‘정신 산업’의 일환이었다.

 

예술은 경제의 근육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그의 철학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돈으로 미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미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돈은 맹목이다.” 그의 발언은 오늘날 ESG 경영의 원형처럼 들린다.

 

또한 그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했다. 정치 권력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국가 발전이라는 대의에 협력하는 절묘한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영은 한편으로 ‘재벌’이라는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집중이 있어야 혁신이 있다”고 응수했다. 당시 한국은 인프라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분산보다 집중, 경쟁보다 시스템을 택했다. 그것이 훗날 ‘삼성 왕국’으로 불리는 기업 제국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늘 국가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국가 프로젝트’로 설계했다. 냉전의 격랑 속에서도 미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시장을 넘나들며 ‘한국의 길’을 찾았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 언론은 그를 ‘마지막 근대인’이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기업보다도 더 거대한 사상을 남겼다.

 

‘삼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가 꿈꿨던 것은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자립국가의 청사진이었다.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이룬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호암정신’이 얼마나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가 남긴 유산은 숫자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사람 중심의 경영’과 ‘사회적 책임’은 단지 표어가 아니라, 위기의 한국 산업을 일으킨 신념이었다. 그의 일생은 유교의 근면, 불교의 절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효율이 한 인물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재계가 그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단지 과거의 창업주를 기리는 데 있지 않다. 이병철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에는 한국 경제의 출발점이자, 자본주의의 도덕적 기준이 함께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업은 인간과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 그 한 문장이 이병철이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요약한다.

 

의령의 소년이 한국 자본주의의 심장을 세우기까지, 그것은 한 사람의 성공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선언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 위에 서 있다면, 그 뿌리는 분명 그가 닦은 길 위에 놓여 있다. 이병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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