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K-콘텐츠는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제 한국 경제의 전략 산업이며, 세계 문화시장의 주요 축 중 하나로 성장했다. 영화, 음악, 게임, 웹툰, 방송 등으로 구성된 한국 문화산업은 세계 시장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구조를 바꾸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민간 기업의 전략적 확장이 공존한다.
세계 문화산업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디지털 스트리밍, 인공지능, 팬덤 경제, ESG 가치 등은 트렌드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OTT 플랫폼과 글로벌 팬덤의 결합은 기존의 문화 유통 체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은 위기보다는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OTT 시장의 확산은 가장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주도하는 글로벌 플랫폼 생태계 속에서, 한국은 ‘공급국’을 넘어 ‘공동 제작국’으로 자리 잡았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 이후, 한국형 서사와 제작 시스템에 대한 글로벌 신뢰가 형성되었고, 다수의 공동 제작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정부 역시 세제 혜택, 공동 펀드 조성 등 정책적 장치를 마련하며 해외 자본의 국내 유입을 촉진하고 있다.
동시에 국내 OTT의 자립 또한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웨이브, 티빙, 왓챠, 쿠팔플레이 등은 기술 경쟁력과 독점 IP 확보를 통해 자생력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웨이브와 티빙이 합병하는 형태의 ‘K-OTT 동맹’도 추진 중이다. 이는 플랫폼 경쟁을 넘어, ‘K-콘텐츠 생태계의 자율적 유통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변화의 중심에는 IP 산업이 있다. IP, 즉 지식재산권은 이제 콘텐츠 산업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산이 되었다.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캐릭터, 하나의 노래가 여러 산업으로 확장되며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BTS의 캐릭터 ‘타이니탄(TinyTAN)’,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넷플릭스 드라마화는 모두 한국식 IP 확장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이에 대응해 IP 기반 스타트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IP 관리 체계를 표준화해 저작권 보호를 강화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IP 거래를 활성화하려는 제도를 마련 중이다. 이러한 정책은 콘텐츠를 단순한 문화상품이 아니라 ‘산업 자산’으로 재정의하는 시도다.
한편 기술혁신은 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 생성형 AI는 콘텐츠 제작 전 과정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번역, 더빙, 시나리오 초안, 영상 합성 등에서 AI는 이미 실무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기업들은 AI 보컬 학습을 통해 실제 가수의 음성을 재현하고, AI 작곡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새로운 음악을 실험하고 있다. 이는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메타버스 또한 한국 문화산업이 주목하는 주요 무대다. 버추얼 아티스트 ‘플레이브’나 ‘메이브’는 현실 가수 못지않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으며, 제페토와 이프랜드 같은 국내 플랫폼은 가상공연과 팬미팅을 상시화했다. 정부는 이러한 흐름을 지원하기 위해 ‘메타버스 콘텐츠 제작 지원사업’, ‘AI+XR 융합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기술과 창작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팬덤 경제는 K-콘텐츠 산업의 또 다른 핵심 축이다. 팬들은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 스스로 산업의 주체로 변모했다. 하이브의 ‘위버스(Weverse)’, SM의 ‘버블(Bubble)’ 같은 팬덤 플랫폼은 팬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고, 팬들이 직접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한국은 팬덤을 ‘산업 자산화’하는 데 성공한 드문 국가다.
이러한 구조는 글로벌화 전략과도 연결된다. 한국의 콘텐츠 기업들은 현지화(Localization) 전략을 적극 도입하며, 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글로컬(글로벌+로컬)’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CJ ENM은 전 세계 13개 지역에 제작 법인을 설립했고,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해외에서 현지 작가들과 협업한 웹툰을 제작 중이다. 이는 ‘수출 중심 한류’에서 ‘공동 생산형 한류’로의 진화를 의미한다.
정책 차원에서도 한국은 글로벌 협력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해외 한국문화원(KCC)을 중심으로 한류 기반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한국 콘텐츠 기업의 진출을 지원한다. 이러한 공공·민간 협력은 한국이 콘텐츠 수출국을 넘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허브국’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기반이 되고 있다.
지속가능성과 윤리경영 또한 산업의 새로운 키워드다. 세계적으로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가치가 확산되면서, 콘텐츠 산업도 환경 보호, 다양성,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은 이에 발맞춰 젊은 창작자들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드라마 '소년심판', 영화 '브로커' 등은 사회적 논의를 촉발시키며 ‘가치 중심 콘텐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정부, 기업, 창작자, 그리고 팬이 있다. 과거에는 국가 주도 혹은 시장 주도의 이분법적 구도가 강했지만, 이제는 네 개의 축이 상호작용하며 생태계를 형성한다. 정부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기술과 자본을 공급하며, 창작자는 혁신을 실험하고, 팬은 산업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K-콘텐츠의 성장 서사는 창의성, 기술력, 팬덤이라는 세 축이 긴밀하게 맞물린 구조가 존재한다. 한국은 이 삼각 구도를 통해 문화와 기술, 소비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가 견고할수록, 그 안에서 창의성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형태로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제기된다.
글로벌 문화산업의 중심이 ‘콘텐츠 생산’에서 ‘경험 제공’으로 옮겨가는 지금, 한국의 문화산업은 가장 빠르게 그 변화에 적응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경험의 산업화가 예술적 실험과 감수성을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025년의 한국 문화는 더 이상 ‘한류’라는 이름 아래의 단일한 흐름이 아니다. 기술과 감성, 경제와 윤리가 교차하는 복합적 장(場) 속에서, 콘텐츠는 세계와의 대화 수단이자 정체성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그 대화는 점점 다층적이고 세련되어지고 있으나, 그만큼 ‘한국적’이라는 개념 또한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다. K-콘텐츠의 미래는 바로 그 재정의의 과정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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