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경영활동 중에서 무려 8000건이 넘는 행위가 형사처벌 대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행정 절차에서의 실수나 서류 누락까지도 형벌 규정에 걸릴 수 있다 보니 기업 경영에 '형사 리스크'가 과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한국경제인협회가 21개 부처에서 소관하는 경제 관련 법률을 모두 조사한 결과, 기업 활동과 직접 연관된 346개 법률 가운데 총 8,403건의 위반행위에 형사처벌 조항이 달려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91.6%에 해당하는 7,698건은 양벌규정도 적용돼 실제 위반을 저지른 임직원뿐 아니라, 회사 자체도 함께 처벌받게 된다.
형벌 관련 조항 가운데 약 3분의 1에 이르는 2,850건은 두 가지 이상의 제재가 한꺼번에 부과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2중 제재가 약 1,900건, 3중 제재 700여 건, 4중·5중 제재도 150건이 넘는다. 실제로 사업자끼리 가격이나 생산량 정보를 공유하면, 공정거래법상 부당공동행위로 판단되어 징역과 벌금은 물론 과징금과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한꺼번에 부과될 수 있다.
평균 처벌 수위도 만만치 않다. 전체 형벌 조항의 평균 징역 기간은 4.1년, 평균 벌금 액수는 6,373만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위반의 경중과 관계없이 처벌 강도가 지나치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매장 앞에 간이테이블이나 차양막을 달았다가 '불법 증축'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었고, 화장품 라벨이 약간 훼손된 제품을 보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3년 이하의 징역형이 가능하다는 규정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형벌 조항이 단순한 위법 행위뿐만 아니라 행정 절차상의 착오까지 포괄한다는 데 있다. 기업집단 지정 과정에서 매년 제출해야 하는 특수관계인 명세서나 주식 보유현황을 단순 누락해도 형사처벌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실무상 작은 실수나 시스템 오류로도 쉽게 형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구조가 기업들이 예측 가능한 경영 환경을 만들기 어렵게 하고, 결국 새 투자나 혁신을 위축시킨다고 지적한다. 특히 대기업뿐 아니라, 법무나 컴플라이언스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는 행정 부담과 법적 불확실성이 경영 전반에 걸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단순한 행정의무 위반이나 실수까지 형사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며 "이런 항목은 형사처벌 대신 금전 제재 위주의 행정질서벌로 돌리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형사처벌은 명백한 범죄에 한정해야 하며, 행정적 위반사항은 경고나 과태료처럼 비형벌적 방식으로 전환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최근 경제영역의 형벌 합리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작 기업 현장에서는 아직 눈에 띌 만한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규제 개선 속도가 느리고, 부처 간 이해관계가 얽혀 현실적으로 조정이 쉽지 않아서다.
이번 조사는 단순한 통계를 넘는 의미가 있다. 기업의 활동이 법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규제가 지나치다 보면 오히려 경제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형벌 중심 제도가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고 보수적으로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면, 장기적으로는 산업의 경쟁력 자체마저 약해질 수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예방' 중심의 제도 설계다. 불법 행위는 엄격히 억제하더라도 의도치 않은 실수나 행정적 오류는 교정 중심의 행정제재로 유도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가 기업 활동을 막는 족쇄가 아니라 건강한 시장질서를 지키는 안전망 역할을 하도록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미 기업 경영의 현장은 형사 리스크로 포화 상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처벌 범위의 확장이 아니라 보다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영 환경으로의 회복이다. 법이 억압의 장치가 아닌, 혁신과 책임이 공존하는 토양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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