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확산된 ‘사기 콤파운드’가 이제는 인권과 치안, 그리고 국제 자금세탁(AML) 체계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유엔 인권기구는 “수십만 명이 로맨스·투자사기, 불법도박, 암호자산 세탁에 강제 동원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역내 정부와 국제기구는 합동단속과 제재를 강화 중이다. 피해금은 암호지갑과 환치기, 차명법인을 타고 이동하며, 범죄조직은 ‘보안이 느슨한 국가’를 따라 금융허점을 파고든다.
필리핀은 작년에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2024년 하반기 POGO(오프쇼어 도박) 산업의 단계적 폐쇄를 발표했고, 대통령령(EO No. 74)으로 전면 금지를 확정했다. 범죄·치안비용과 인신매매 피해 등 사회적 손실이 경제적 이익을 압도한다는 판단이었다. 규제당국(PAGCOR)은 면허 취소 일정을 공개했고, 수천억 원대 세수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경제보다 사회의 안정이 우선”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검증되지 않은 외국계 자금이 시장 교란
이 같은 회색경제의 그림자는 한국 금융시장에도 번지고 있다. 겉으로는 외국인 자금 유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검증되지 않은 외국계 자금 흐름이 코스피와 환율을 동시에 흔들고 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암호자산 환전과 역외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한 단기성 자금 유입이 급증했다. 이들 자금은 대형주·전략산업주를 집중 매수했다가 단기간에 청산하는 패턴을 반복하며, 환율과 지수의 인위적 동조화를 일으키고 있다.
FIU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코스피 외국인 순매수 24조원 중 약 18%가 출처 불명 또는 조세회피처 경유 자금으로 확인됐다. 이 자금의 상당수는 싱가포르·홍콩·마카오 등 역외 금융허브를 거쳐 들어왔으며, 1~2개월 내에 다시 매도·현금화돼 빠져나갔다. 이른바 ‘순환형 자금(Hot Money)’이 시장을 교란하는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FIU은 "최근 일부 외국계 단기자금의 유입 형태를 보면 단순한 포트폴리오 투자라기보다, 외환·증권시장을 동시에 활용해 단기 차익을 노리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며 “자금세탁방지 체계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단순 세탁 수법이 진화해, 환율 변동과 지수 흐름을 연계하는 이른바 ‘환율세탁’ 형태로 확산되는 조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유형의 자금은 유입 규모보다 시장 변동성을 자극하는 속도와 반복성이 더 큰 문제”라며 “감시망을 비금융 부문까지 확장해 원천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환율세탁(Exchange Rate Laundering)’은 세탁된 자금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 단기 환차익을 노리는 형태를 말한다. 기업이나 역외법인이 가상자산–현금–수출대금을 교차 환전하며 원화·위안화·달러를 오가고, 이 과정에서 코스피 매매·선물환 포지션·환율 변동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
실제로 최근 3개월간 원·달러 환율은 1380~1488.32원 사이에서 넓은 폭으로 출렁였다 변동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수요와 무관한 자금이 환율을 자의적으로 흔들면, 코스피는 실물경제를 반영하는 지표가 아니라 단기 유동성의 파생지표로 전락하게 된다.
▲FATF 경고, "韓 AML 체계 비금융은 취약"
FATF는 2025년 2월 평가보고서에서 “한국의 가상자산 추적 역량은 우수하지만, 부동산·법인투명성·도박 부문은 여전히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서울·부산 등 주요 지역의 부동산 거래에서 외국계 역외법인 소유 비율은 2018년 대비 3배 증가했고, 일부는 가상자산 전환·차명 전세금 루트를 거친 거래로 드러났다. 자금이 실물자산으로 전환되면 AML 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코스피와 부동산이 동시에 부풀어 오르는 ‘이중버블(Double Bubble)’이 형성됐다. 단기 자금이 환차익과 차익거래를 반복하는 사이, 실물경제의 체온과 금융지표의 온도는 완전히 따로 움직인다. 자금세탁의 문제는 단지 금융에 그치지 않는다.
UN 등 국제기관은 일부 중국 원양어선이 북한 선원을 고용해 유엔 대북제재를 위반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문제는 이 수산물이 글로벌 식품·사료·콜라겐 공급망에 섞여 있다는 점이다. 한국 수입업체가 인권실사와 제재 스크리닝을 소홀히 하면, 세컨더리 제재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AIS(선박위치 식별)와 환적 데이터 기반의 ‘수입 전 심사제’를 도입하고, 고위험 수역 거래를 실시간 통제할 시스템을 서둘러야 한다.
▲경제안보의 적은 침묵이 아니라 절차의 부재다
‘자본의 회색지대’는 총칼이 아니라 법·계약·데이터의 빈틈으로 침투한다. FATF의 권고처럼 AML(자금세탁방지)은 더 이상 금융기관만의 과제가 아니다. 카지노·부동산·가상자산·환전소·수산 조달까지 전 산업에 걸친 통제선 강화가 필요하다.
독일의 지분 캡(의결권 제한), 호주의 국가안보 심사, 케냐·우간다의 계약 원문 공개, 그리고 필리핀의 POGO 폐지 결정이 보여준 것처럼, 문서화·공시·감시체계 즉, 국가 안보체제는 경제 영역에서도 유지돼야 한다. 한국 역시 지분·의결권 상한, 계약·투자 사전심사, 고위험 거래 실시간 탐지, 비금융 AML 통합체계를 상시 운영체계로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안보의 적은 침묵이 아니라 절차의 부재다. 지금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검증되지 않은 외국계 자금’의 회색 회로 속에 자신도 모르게 연결될 것이다. 한국 금융의 방어선은 규제가 아니라 투명성과 절차의 견고함이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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