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가 3천만원인데 수조 속에서 사람이 사는 장면을 찍으려면? 수중촬영팀과 장비가 필요한데... 이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대학원 시절 독립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가장 자주 듣고, 했던 말이다. 시나리오 속 한 장면이 현실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끝자리에 ‘0’ 하나가 필요했다. 우리는 “발품 팔러 가자”는 자조 섞인 말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창작의 의도보다 숫자의 한계가 먼저 우리를 가로막던 시절이었다.
요즘 들어 그때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 필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경기도 문화의 얼굴이자 가장 유망한 브랜드로 성장시킬 분야라 믿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볼수록 제도와 구조의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통합 운영의 현실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분리 독립’의 필요성을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라 경기도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향한 애정 어린 과제로 받아들이게 됐다.
경기도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개관한 경기도박물관과 2006년 문을 연 경기도미술관은 도 직영 사업소로 시작했지만 2008년 이후 순차적으로 8개 기관이 경기문화재단으로 위탁됐다. 8개의 도립 박물관·미술관을 동시에 위탁 운영하는 곳은 전국에서 경기도가 유일하다.
문제는 이 통합 운영이 효율을 앞세운 구조 속에서 각 기관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연간 예산은 총액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예술인 지원, 생활문화, 예술교육, 복합문화공간, 박물관, 미술관 운영까지 모두 소화해야 한다. 이 구조 속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수준 높은 전시를 기획하려 해도 예산은 늘 ‘분배의 논리’에 갇힌다. 작품 구입비는 턱없이 부족하고 전시는 소규모로 축소된다. 좋은 기획안이 나와도 초기 기획이 실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홍보와 마케팅 인력, 예산 또한 중앙의 뮤지엄들과 비교할 수 없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에 비유하면 정확하다. 기획력이나 열정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와 자원의 차이가 만든 격차다.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K-굿즈의 흐름 속에서도 경기도 뮤지엄이 그 대열에 서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예산의 제약이 곧 기획의 제약으로, 다시 도민의 문화 향유 기회의 한계로 이어진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한 친구가 부모님이 해외에서 사온 과자를 친구들에게 두 개씩 나눠 주다 마지막 친구에게 “엇, 하나만 남았네”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분배의 강박이 누군가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박물관·미술관 운영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정해진 틀 안의 통합 운영만으로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제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 이제는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전문성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행정적 효율이 아닌 문화적 창의성을 중심에 둔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장소 중 박물관과 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도시의 품격이자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의 얼굴이다. 경기도립 박물관과 미술관 역시 도민의 자부심이자 경기도의 대표 브랜드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한다.
‘분배식 예산 중심의 운영’을 반복할 것인가, ‘창의와 자율의 문화기관’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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