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조선 왕실의 세계문화유산 종묘가 위태롭다. 최근 서울시가 세운상가 재개발계획을 통해 건축물 최고 높이를 145m로 높이는 변경안을 고시하면서, 문화계와 시민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법원은 문체부의 ‘서울시 문화재보호조례 개정안 의결 무효 확인’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법적 제동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ICOMOS)는 “세계유산 지역 내 경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인근 고층 건물 건축은 허가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현실은 권한을 가진 지방정부가 재개발 명분을 내세워 고층 건축 허용을 밀어붙이는 모습이다. 문화유산 보호라는 국제적 약속과 도시 재개발, 두 가치가 정면충돌한 셈이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7일 종묘를 방문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하며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법령 개정과 새 법령 제정까지 검토하겠다는 의지도 명확히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법적·행정적 수단만으로 종묘 주변 개발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사태는 도시 개발과 문화유산 보호 간 균형의 어려움을 다시금 보여준다. 경제적 논리로 재개발을 밀어붙이는 동안, 수백 년 쌓아온 문화적 자산과 세계적 명성은 흔들릴 수 있다. 고층 건축 허용 여부가 종묘의 상징적 경관을 훼손할 수 있으며, 세계유산 목록 삭제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서울시는 고층 건축으로 생기는 그림자가 문화유산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건물 높이 자체가 역사적 경관을 압도하고, 종묘의 상징적 위상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눈앞의 효율이나 개발 논리가 문화유산의 장기적 가치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
국내 사례를 보면, 경복궁 주변도 고층 건물 개발 시 경관 훼손 논란이 반복됐다. 서울시는 ‘경복궁 주변 60m 이하 건축 제한’을 두어 궁궐 경관을 보호했지만, 일부 상업지구 개발과 건물 증축이 겹치면서 논란이 지속됐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의 재개발 사례는 경제적 개발과 문화적 보존이 조화를 이룬 성공적인 예로 평가된다. 마을 건물 형태와 색채를 통일하고 일부 건물을 복원·보존하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것이다.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주변은 건물 높이 제한이 엄격히 적용되어, 역사적 경관을 압도하는 현대 건축물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관리된다. 터키 이스탄불의 역사지구도 세계유산 등재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개발을 엄격히 제한한다. 베니스 운하 지역 역시 고층 건물 건축을 금지하고 도시 기능과 관광을 조율하며 세계유산 가치를 지키고 있다.
경제 성장과 도시 경쟁력 강화는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브랜드 가치는 재정적 지표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종묘와 같은 세계유산은 국가의 문화적 자산이자 국제적 신뢰를 상징한다. 단기적 개발로 얻는 경제적 이익보다 장기적 문화적 가치가 우선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 논란은 법적·행정적 대응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시민사회, 전문가, 지방정부, 중앙정부가 협력해 종묘 경관 보전과 도시 개발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대중적 공감대 형성과 정책적 조정 없이는 갈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문화유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다. 개발 논리로 인해 이 다리가 무너진다면,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 국제적 명성 모두 손상될 수 있다. 종묘 사태는 한국이 어떤 문화강국으로 성장할지,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어떤 가치를 지킬지를 시험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약속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실질적 해결책은 협력과 조율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재개발 논쟁이 경제와 문화의 균형을 어떻게 정의할지, 그리고 그것이 미래 세대에게 어떤 교훈을 남길지는 이제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종묘 주변 재개발 논쟁은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어떤 문화유산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험대다. 지금의 선택이 한국의 문화적 자산과 국가 브랜드에 장기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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