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30년 만에 재배에 성공했다는 식재료가 있다. 바로 '홉'이다. 홉은 한때 한국 맥주의 핵심 재료였지만 수입 품종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천에서는 해마다 50톤이 넘는 홉이 수확됐으나, 외국산이 밀려들면서 재배 농가가 하나둘 사라졌다. 밭은 잡초로 덮였고, 국산 홉은 기억 속에서 잊혔다. 이후 약 30년 동안 국내에서는 홉 재배가 중단됐다.
그런데 2010년대 초, 홍천의 한 농부가 야산에서 덩굴 하나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토종 홉이었다. 그는 땅속 깊이 남아 있던 뿌리를 옮겨 심으며 복원을 시작했다. 오래 잠들어 있던 토종 홉은 다시 싹을 틔웠고, 지금은 아홉 농가가 함께 재배하고 있다.
맥주의 향을 되살린 땅의 힘
홉은 환삼덩굴과 식물로, 줄기가 길게 뻗고 열매 속에는 '루플린'이라는 노란 가루가 들어 있다. 이 루플린이 바로 맥주의 쌉쌀한 맛과 향을 만든다. 손끝으로 문지르면 감귤과 허브가 섞인 듯한 향이 퍼지고, 입안에서는 쓴맛 뒤에 단맛이 남는다. 이 흙 내음 섞인 향을 두고 농부들은 ‘땅이 만든 맛’이라 부르기도 한다.
홉의 수확은 8월 말에서 9월 초에 이루어진다. 꽃송이를 탈곡기에 넣어 씨방만 모으는데, 햇빛에 오래 노출되면 향이 날아가 새벽이나 해 질 무렵에 작업이 이뤄진다.
이렇게 모은 홉은 즉시 건조기에 넣어 수분을 제거한다. 수분이 남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향이 변하기 때문이다. 건조를 마친 뒤에는 밀봉해 영하 1~3도의 냉장고에 넣어둔다. 루플린의 향을 오래 유지하려면 산소와 빛, 열을 차단해야 하고, 진공 포장 시 최대 2년까지 품질이 유지된다.
직접 만들어보는 '수제 맥주'
수확을 마친 뒤 농가에서는 직접 맥주를 만든다. 보리와 밀을 싹 틔워 건조한 맥아를 분쇄해 70도 정도로 끓인 후,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당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맥아즙에 홉을 넣는다. 홉을 끓이는 시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초반에 넣으면 쓴맛이 강해지고, 마지막에 넣으면 향이 깊어진다.
이후 효모를 넣고 1차 발효를 거쳐 병에 넣으면, 3일~5일 후 향긋한 맥주가 완성된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은은한 단맛이 도는데, 이는 곡물 속 전분이 당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홍천의 토종 홉으로 만든 맥주는 시중 맥주보다 향이 깊고 쓴맛이 선명하다. 요즘은 이런 홉을 이용한 수제 맥주 체험장을 운영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직접 홉을 수확해 끓이고 발효하는 과정을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홉의 효능,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식물
홉은 맥주의 재료를 넘어 인체에도 좋은 효과를 준다. 루플린에는 휴물론과 루풀론이 들어 있어 신경을 안정시키고 숙면을 돕는다.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홉을 베개 속에 넣어 잠을 유도했고, 독일과 체코에서는 홉 차를 위장 진정용으로 마셨다.
또한 홉에는 폴리페놀과 플라보노이드 같은 항산화 성분이 풍부해 세포 산화를 늦추고 노화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루플린 속 ‘제록사토훈’은 염증 완화와 세균 억제 기능을 해 체내 염증을 줄이고 면역 반응을 높일 수 있다.
특히 여성에게도 이롭다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독일 뮌스터대와 프랑스 툴루즈대 공동 연구진은 학술지 'Nutrients' 에 발표한 논문에서 연구진은 12주간의 임상시험을 통해 홉 추출물 섭취 군에서 골 형성 관련 지표가 평균 11% 개선됐다고 보고했다.
또한 홉 추출물이 여성호르몬과 유사한 식물성 에스트로겐 ‘8-프레닐나린게닌(8-PN)’을 함유해 골밀도 유지와 폐경기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이에 서유럽 지역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 건강기능식품이 이미 판매 중이다.
국산 홉, 어디서 구매할 수 있나
토종 홉은 일반 마트에서는 구하기 어렵지만, 최근에는 온라인 농가 직거래 몰이나 수제 맥주 재료 전문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홍천 토종 홉’, ‘국산 생 홉’, ‘홉 펠릿’ 등의 이름으로 판매된다. 가격은 품질과 형태에 따라 다르며, 생 홉은 100g당 7000원, 건조한 홉은 5000원 정도다.
직접 맥주를 만들거나 향료로 이용하려면 건조한 홉이 다루기 쉽다. 가정용 맥주 제조기나 홈브루잉 세트에 그대로 넣어 맥주로 마시거나, 허브차처럼 우려 마셔도 좋다. 홉 차를 만들 때는 끓는 물 90도 정도에서 3~4분만 우려내야 향이 날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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