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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ont> >
[정하윤 미술평론가] 새벽의 작업실. 묵직한 작업틀 위에는 오늘도 여러 빛깔의 실이 엉켜 있다. 그는 붓 대신 실을 집어들고 천천히 작품을 짜 내려간다. 그 손이 그리는 실의 궤적은 하나의 작품을 넘어 한 시대를 살아온 모든 여성의 기록이 된다. ‘섬유예술’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이신자(94)는 그렇게 실로 세상을 새롭게 엮어냈다.
그 시작은 오래전 경북 울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였다. 바람이 불면 베틀의 북이 덜컥거리고 마당 한쪽에서는 길쌈하는 어머니의 손이 멈추지 않던 집. 천과 실을 다루는 손이 늘 바쁘게 움직이던 그곳에서 이신자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열 살 무렵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미술에 대한 감각은 1950년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에 입학하면서 무르익었다. 일제강점기에 유학한 여성 예술가들이 귀국한 뒤 자수공예가로 활동하고, 국가에서는 ‘현모양처’의 덕목으로 바느질을 권장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섬유 분야는 여전히 ‘길쌈과 자수’에 머물러 있던 그 시절, 이신자는 대학에서 동경미술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1905~1986)에게 원앙과 봉황, 십장생 등 전통적인 모티프를 자수작품으로 제작하는 법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천과 실에 익숙했던 손길이 결국 그를 포근하고 섬세한 직조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배움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신자는 피란길에 올라야 했고 떠밀려 내려간 부산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가방 디자인, 목공예, 조각, 무대장치 등 닥치는 대로. 그런데 이런 생계형 작업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용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든 셈이니 말이다.
◇관습 뛰어넘은 대담한 도전…“한국 자수 망쳤다” 비난도
1955년 대학을 마친 이신자가 졸업을 전후해 발표한 작업들은 무척 새로웠다. 기존 작업들이 명주실로 촘촘하고 부드럽게 수를 놓아 천을 메웠다면 그는 굵은 면사나 스웨터를 풀어낸 실을 다양한 두께로 꼬아 거친 표현을 선보였다. 손수 염색한 실로 색을 내기도 했다.
독특한 이신자의 작업은 금세 주목을 받았다. 1954년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처음 입선한 뒤, 1955년 입선, 1956년 문교부장관상, 1957년 무감사 특선, 1958년 문교부장관상, 1959년 무감사 특선을 연이어 수상하며 30세 젊은 나이에 국전 추천작가로 선발됐다. 그러나 늘 그렇듯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종종 오해를 낳았다. “대한민국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는 악평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격은 곧 한국 섬유예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여성 대부분이 살림을 도맡던 시절이다. 천으로 의복과 침구를 만드는 일은 가사노동이라 여겼고, 자수는 오래도록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고정관념 위에 이신자는 형상을 해체하고 형태와 색에 집중한 추상적인 작품들을 올려 낡은 틀을 깨나갔다. 섬유작업이 ‘여성의 손끝에 머무는 공예’라는 인식을 뒤집고 당당히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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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세계적으로 볼 때 섬유를 예술의 영역에 편입시킨 이는 이신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출신의 소니아 들로네(1885∼1979)는 아들을 위해 조각보 이불을 만들다가 그 속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봤고, 한국의 김수자(68)는 바느질 행위 자체를 예술언어로 확장했다. 프랑스 출신 미국작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는 어머니와 함께 태피스트리를 만들던 기억을, 중국의 린톈먀오(64)는 실타래를 잡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작품으로 되살렸다. 시대와 지역은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성으로서 익숙했던 천과 바늘, 실과 자수를 예술의 매개로 삼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심과 비판을 견뎌야 했다. 천과 실로 만든 작품을 미술관에서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그 뒤에는 이신자를 비롯해 많은 여성 예술가의 고군분투가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 이신자는 태피스트리를 한국에 제대로 소개했다. 태피스트리는 세로실(날실)과 가로실(씨실)을 교차시켜 무늬나 그림을 짜 넣는 직물예술로, 반복된 무늬를 기계적으로 짜는 직조와는 다르다. 작가가 한 올 한 올 색을 바꾸며 그림을 그리듯 짜 내려가는 과정에서 실은 붓이 되고 베틀은 캔버스가 된다. 그래서 태피스트리는 ‘실로 짠 그림’, 곧 ‘직물로 만든 회화’라 불린다. 이신자는 1972년 국전에서 이를 과감히 선보였고, 다채로운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 서로 다른 질감이 어우러진 대형작품을 발표하며 섬유예술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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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는 남편 장운상(1926∼1982) 화백이 긴 병상 생활을 이어가던 때와 맞물린다. 이신자는 한층 서정적인 색채로 ‘원’의 형태를 끊임없이 그려냈다. 그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원은 막힘이 없잖아요. 세상살이도 막힘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원을 많이 그렸어요. 우리 양반도 아프고 해서 소원성취하라는 의미였지요.” 그의 말처럼 이신자의 ‘원’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순탄한 삶과 치유를 바라는 기도의 형상이었다.
◇고향 울진의 바다와 산, 반추상으로 작품에 녹여
하지만 끝내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이신자는 고향 울진의 자연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였다. 기억 속의 바다와 산은 그의 손에서 추상적인 색면으로 변주됐고, 때로는 길이 19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열정은 체력을 뛰어넘었다. 밤 낮 없이 작업하다 새벽녘에 쓰러지기도 하고, 사다리에서 추락해 머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지만 퇴원한 다음 날 곧장 작업실로 돌아갔다. 비단 그 열정이 작품에만 머물지 않았다. 태피스트리를 전수하며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30여 년 덕성여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동안 태피스트리가 대학교육 과정에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한국 섬유예술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이신자는 “실로 그림을 그린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말은 곧 “삶을 직조한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태피스트리가 곧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작업하는 과정이 삶을 사는 방식과 닮았다는 뜻이다. 날실을 캔버스로 두고 씨실을 붓 삼아 그려가는 예술 태피스트리. 날실이 주어진 조건이라면 씨실은 작가의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흐름이다. 그 과정에서 우연한 색채가 스며들고 예기치 못한 문양이 피어난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주어진 운명(날실)에 자신의 의지(씨실)를 더해 삶을 짜 나간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시대에 한국의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이신자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지만 그는 그 위에서 선택을 하고 의지를 다지며 아내이자 어머니, 예술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직조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태피스트리 작품은 ‘삶의 은유’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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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자의 예술은 실과 천, 시간으로 짜인 기록이다. 길쌈에서 출발한 손의 예술은 회화와 공예,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언어가 됐다. 실로 그림을 그리고, 삶을 짜온 여정은 곧 한국 섬유예술의 역사이자 한 여성 예술가의 흔들림 없는 삶의 기록이다. 왜 섬유를 선택했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이신자는 “재료가 갖는 포근함과 따뜻함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이제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따뜻하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직조하고 있나요? 그 삶은 충분히 아름다운가요?”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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