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글로벌 감염병 위기가 완전히 진정되기도 전에 백신·필수 의약품 공급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소아용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백신 예약이 잇따라 취소되며 보호자 우려가 확산하는 가운데, 이번 사태가 일시적 차질을 넘어 공급 체계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국립중앙의료원은 소아용 RSV 백신 ‘베이포투스(사노피)’ 공급이 중단돼 예약 접수가 불가하다고 공지했다. 1회 접종비가 50만~70만원에 이르는 고가임에도 예측을 웃돈 수요가 몰렸지만, 제약사 공급 차질과 정부의 사전 대응 부재가 맞물리며 공백이 발생했다. 매년 반복되는 호흡기 질환 시즌에도 백신·치료제 공급망이 취약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급난은 백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고된 공급 중단·품절 의약품은 지난해 658건으로 전년(29건) 대비 17배 이상 급증했다. 이 중 31개 품목은 사전 신고도 없이 전량 공급이 끊겼다. 공단이 제약사와 공급의무 조항을 담은 ‘요양급여 합의서’를 체결하고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낮아 사실상 자율 준수에 의존하는 구조다. 공단 관계자는 “신고 의무가 느슨해 공급 상황 자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병원·약국 현장에서도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가 현실적 위협으로 번지고 있다. GSK의 흡입제 ‘트렐리지 엘립타’, 한국화이자제약의 여성용 치료제 ‘에이리스정’, 한미약품의 안과용 ‘트로페린점안액’ 등 주요 품목이 생산지 지연·원료 수급 차질로 잇따라 품절되고 있다. 흡입제·점안제처럼 사용기기 적응과 환자 순응도가 중요한 제형은 대체가 사실상 어려워 공백이 곧 치료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공급난 배경에는 ‘채산성 악화’가 자리한다는 분석이다. 퇴장방지의약품 628개 중 197개(31%)는 5년 넘게 약가가 동결됐고 일부는 20년 넘게 11원에 묶여 있다. 정부는 가격 억제를 안정 공급 장치로 설명하지만, 낮은 수익성 탓에 최근 3년간 79개 품목이 생산·공급 중단을 신고했다. 필수의약품을 떠받칠 공공보건 안전망이 오히려 ‘가격 통제’에 발목 잡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정부도 제도 보완에 나서고 있지만 속도와 일관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식약처가 공급 부족 사전 보고 기한을 180일 전으로 확대하는 등 관리 장치를 강화했으나, 복지부·공단·식약처가 각자 역할을 수행하는 현 체계에서는 공급 위험을 일원화해 관리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한 관계자는 “법적 강제력이 확보되지 않는 한 자율 통보 중심의 모니터링은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급 기반 자체가 시장 논리에 좌우된다는 점도 리스크로 꼽힌다. 낮은 수익성 품목은 지속적으로 해외로 이전됐고, 필수의약품 다수가 단일 제조원·단일 원료에 의존하는 구조로 고착됐다. 해외 생산 차질이 곧바로 공급 중단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반복되는 배경이다. 특히 흡입제·점안제 등 환자 순응도와 기기 호환성이 중요한 제형은 대체가 어려워 치료 연속성 우려가 커진다.
현장 대응력 역시 미흡하다는 시각도 있다. 공급 모니터링 대상이 올해 1만9000개에 육박하지만, 사전 경보 시스템은 여전히 제약사 통보에 의존한다. 실제 신고된 공급 중단 658건 중 상당수가 사전 공유 없이 발생했다. 공단 모니터링 품목이라도 행정제재 적용이 쉽지 않고, 채산성 저하를 이유로 한 일방적 공급 중단을 막을 수단도 제한적이다.
생산 기반 공백이 누적되는 것도 핵심 문제다. 원료 수입 지연이나 해외 제조사 철수 시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예비 생산 라인이 부족하고, 재고·조달 시스템도 체계화되지 않았다. 스페인 제조원 계약 종료로 공급이 중단될 모노리툼플라스정, 허가 취하로 시장에서 사라진 베톱틱에스점안액이 대표적 사례다. 업계에서는 단기 조치 중심 대응이 장기적 공급 역량을 약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공급 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약가 인상이나 단기 수입 조달 같은 사후 처방만 반복되는 사이 단일 해외 생산 구조와 원료 수입 의존도는 오히려 심화됐다”며 “공공 생산 기반 없이 민간 자율에만 기댄 구조에서는 예비 생산조직·국산 대체 기반·재고 안전망이 모두 비어 있어 공급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이어 “필수의약품은 시장 논리만으로 관리할 수 없는 만큼, 공공 조달과 장기 계약 등 국가 차원의 공급 인프라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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