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신화와 규율의 구조적 관계: 문화적 정체성에서 권력의 장치로
신화는 옛날이야기나 허구를 넘어서, 한 사회의 문화와 전통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정체성의 근간이다. 각 민족과 공동체는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온 신화적 서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과 집단적 존재 이유를 확인한다.
이처럼 신화는 또 하나의 '언어'이며, 조상들의 기원과 삶의 방식, 철학, 그리고 소중히 여기는 정신적 가치를 담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다.
신화 속에 있는 메시지는 오랜 세월 동안 후대에 구전되고 기록돼 사회의 정치, 문화, 종교 영역에 튼튼히 뿌리내린다. 이는 국가, 민족 단위를 아우르는 공동체적 결속력을 제공하고, 종교관과 민족관, 국가관의 형성에 기여한다. 신화가 가진 이 역할은 단순히 상징적 의미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학교, 기업, 군대 등 다양한 조직에서 역할을 규정하는 기본적 규율과 체계의 토대를 제공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 단위에도 신화에서 파생한 문화 규범이 스며들어 가족 구성원의 행동 양식을 강하게 통제한다.
결국 신화는 사람들이 '왜 특정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는 근본적 질문에 답하면서, 그 안에 담긴 규율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행동 규제를 내포한다.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하고, 사회 내부의 보이지 않는 권력 기제로 자리매김한다. 신화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는 신화를 과거의 전통 이야기가 아닌, 현존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은폐하는 '포장지'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성공은 노력의 결과다'는 명제는 근면과 자기 계발의 가치를 표면적으로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이라는 숨겨진 구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노동을 강요하는 도덕적·규율적 메시지를 내포한다. 현대 사회에서 광고, 뉴스, 교육, 영화 속 영웅 서사 등은 신화적 이야기를 현대화한 형태로써 질서와 복종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또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신화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반면, 규율은 우리의 신체와 행동을 조직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하며 두 개념을 구분했다. 학교 종소리와 줄 세우기, 군대의 복장 통일, 병원의 침상 정렬, 기업의 업무 프로토콜 등은 모두 개인을 집단 내부에서 통제하고 훈련하기 위한 규율적 장치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규율 구조는 외부에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내면화돼 자기 검열과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는 '규율 권력'으로 전이된다.
이런 점에서 신화는 단지 허구적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 사회적 규율과 통제를 담아낸 '규제의 장치'로 기능한다.
◇ 신화와 규율의 교묘한 결합: 과거와 현대 사례
신화와 규율이 결합하는 방식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교묘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옛 신화는 물론 현대의 허구적이거나 추상적 이야기가 조직과 집단의 결속을 다지며 그 목적을 수행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대는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신화적 서사로 정당화한 조직이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명예롭다는 신화를 내면화하고, 그 안에서 엄격한 규율과 복종을 수행한다. 이런 신화는 국가를 위한 희생을 정당화하며, 실제로 많은 군인에게 '죽음까지 감내할 가치'를 부여하는 강력한 정신적 장치다.
이는 개인의 생명을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한 신화적 이야기 안에 포섭시켜 규율하는 매우 강력한 권력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현실은, '내가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영웅'이라는 신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역시 신화가 개인의 감정과 행동을 깊이 규율하는 현대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신화는 허구 이야기 그 이상으로,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과 사회 질서를 심는 근본적 사회적 장치였다.
고대 이집트 신화가 사후 세계와 질서 개념(마아트)을 전달하며 법과 윤리 체계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 신화가 인간과 자연, 신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며 초기 과학과 철학 사유의 토대를 닦은 것처럼 신화는 인간 사회의 도덕과 규범, 제도의 뿌리였다.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과 몰락을 정치·도덕·사회 구조 측면에서 분석하며, 집단 내 덕성과 공공 정신, 정치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신화와 도덕, 권력과 자유가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검토했다.
동시에 20세기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와 현대 철학자 롤랑 바르트 등은 신화가 사회 권력을 은폐하는 도구임을 밝혀내어, 신화를 '이데올로기의 전파자'로 재해석했다.
미셸 푸코가 제시한 '규율 권력' 개념은 사회가 신화를 넘어 '행동의 조직화'를 실현하게 된 측면에서 중요한 철학적 진전이다. '내면화된 규율'은 현대 사회의 감시, 제도적 통제에 깊이 연결돼 있다. (4편에서 계속)
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 미국 컬럼비아대ㆍ오하이오주립대ㆍ뉴욕 파슨스 건축학교 초빙교수 역임 ▲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 현대자동차그룹 서산 모빌리티 도시개발 도시 컨설팅 및 기획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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